길모퉁이 슈퍼, 구불구불 비탈길,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넝쿨과 그 아래 놓인 작은 화분... 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내일, 어제가 있다. '골목길 TMI'는골 목의 새로운 변화와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전쟁이 만든 도시, 우리나라 최초의 기지촌인 '부평 신촌'에서 고향을 애틋하게 지키는 동네 사람들, 골목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문화· 예술인을 만났다.[기자말] |
인천 부평은 굴곡진 근현대사의 아픔을 옹이처럼 품고 있다. 1939년 군수기지인 일본 육군 조병창이 부평에 들어섰고, 1945년 광복 후 미군은 그 땅을 접수하고 미군수지원사령부(ASCOM)라는 간판을 단다.
부평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거대했던 도시, 애스컴 시티. 그곳에서 나온 풍부한 일자리와 물자를 좇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부대 밖도 미군들을 위한 도시가 됐다. 신촌에만 외국인 전용 클럽이 스무 곳 넘게 성업했다.
신촌의 주도로는 '신촌로'였다. 신촌교에서 신촌성결교회까지 이어진 길 따라 음악 클럽, 약국, 양장점, 사진관, 미장원, 양키 상점, 시장이 번성했다. 하지만 애스컴 시티가 해체되며 사람들이 떠나갔다. 오늘 그 길에는 신촌에 단단히 뿌리내린 토박이들과 새 숨을 불어넣는 문화예술가들의 일상이 공존한다.
전쟁이 만든 도시, 신촌 사람들의 삶
신촌에서 나고 자란 이상배(75)씨의 삶은 미군 주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씨는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신촌엔 없는 게 없었다"며 "미국 사람, 미국 음악과 물건이 흔해 서 사람들이 국제도시라고 불렀다"고 회상했다.
영어 간판과 형형색색의 불빛, 달러가 넘쳐나던 신촌.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부평 사람들의 생계를 지탱해 주던 '아메리칸 타운'이었다. "화려했어요. 미군들이 10불이고 100불이고 나와서 쓰니까 돈이 돌았어." 클럽, 미용실, 세탁소, 양장점, 사진관, 목욕탕... 미군을 대상으로 한 가게가 골목마다 성업을 이뤘다. 클럽 뒤편에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들이 사는 단칸방이 밀집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이 집(지금 살고 있는 집)도 짓고, 요 앞에도 짓고 주변에 많이 지었어요. 방이 없어서 세를 못 줄 정도였어요."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국의 외교정책 '닉슨독트린'에 따라 1973년 애스컴 시티는 해체되고, 캠프마켓만 남았다. 부평 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부대가 10분의 1로 쪼그라들자 도시가 멈춰섰다. 가게 불이 꺼지고, 사람이 빠져나갔다. 원주민만 텅 빈 마을을 지켰다. "떠날 생각이 있었지만 부모님이 여기 계시다 보니 고향에 남게 됐어요."
부평구 신촌로 30. 70년 전 할아버지가 지어준 집은 현재 이씨의 사업장이다. 마을 사람들과 배추를 절여 판다. 주변은 많이도 변했지만, 단단히 뿌리내린 신촌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성실하게 삶을 살아낸다.
골목길 따라, 살랑살랑 문화예술의 바람
신촌의 오래된 골목엔 소담한 가게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 몇 년 전부터 신촌로 입구의 '바로크악기점'부터 '장순일음악연구소' 부근까지 공방이 자리잡으며 생기를 잃어가던 골목에 살랑살랑 예술의 바람이 불고 있다.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며 '신촌공예공방거리'라는 이름도 생겼다. 패브릭 소품, 뜨개질, 한지 공예, 가죽·나무 공방, 도자기 페인팅 등 공방지기에 따라 작품도 다양하다. 어느 집을 들어가든 마음씨 곱고 솜씨 좋은 공방지기가 환하게 반겨준다.
'하늘공방'(부평구 신촌로 84-1)은 초벌 도자기를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는 곳이다. "어릴 적 꿈이 화가였어요. 돌고 돌아 결국 붓을 잡았어요." 인터뷰하는 내내 임남숙(50)씨는 쉬지 않고 접시에 꽃을 그려냈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재미있고 행복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3년 전, 친언니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을 만큼 단골도 많이 늘었다. 든든한 언니 덕분에 외부 강의도 다니게 됐다. 발달장애도우미반, 편마비 환자들... 그림 대화가 필요한 곳은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추억 부자가 됐다" 말하면서 그가 활짝 웃는다.
공방지기 마음이 담긴 그림과 간판
가죽 공방 '창아트'(부평구 신촌로 83-1)는 이 골목의 터줏대감이다. 5년 전, 휑한 골 목길 한가운데 홀로 화사한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안창매(66)씨 눈에는 "이 골목이 미워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20년 만에 처음 자신의 공방을 차린 그에겐 월세도 싸고 널찍한 이 공간이 흡족했다. 가꿔나가는 재미도 깨달았다.
"아침에 와보면 가게 앞에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었어요. 치우고 화분을 놓기 시작했어요. 그럼 또 다른 데 버려요. 그러면 또 화분을 더 갖다 놓고." 해가 다섯 번 바뀌는 동안 골목은 몰라보게 밝아졌다. 화분에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는 화창한 날엔 찾아오는 이도 많다.
"우리 집이 예쁘면 딴 집도 예뻐. 사람도 예쁘고." 같은 마음으로 골목을 가꾼 '제니공방'(부평구 신촌로 85) 이금자(59)씨도 말을 거든다. 손은 쉬지 않고 마스크에 연분홍 꽃자수를 놓는다. 주민센터 플리마켓, 캠프마켓 문화 행사, 구청에서 하는 '부평학습다방' 등 가을 행사를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찾는 곳이 많아졌어요. 부평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뿌듯해요." 살랑살랑. 문화예술의 향기가 공방에서 골목으로, 온 마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음악과 추억, 낭만이 '바운스 바운스'
부평공원 맞은편, 신촌 초입에 자리한 '펍 캠프마켓'(인천시 부평구 부평공원로 61-1)은 소병순(66)·이연옥(68) 부부의 공간이다. 지난 2015년 '갤러리61', 2019년 '펍 캠프마켓'을 열고 공연과 전시를 이어오고 있다.
"1985년에 여기 처음 왔는데, 허름한 클럽 몇 개만 남아 있었어요. 그 흔적들을 거슬러 올라가니 아픈 역사와 맞닿아 있더라고요." 조병창부터 애스컴 시티까지 옹이 진 역사가 그의 가슴에 박혔다.
"전후 가난이 극심하던 때, 군부대와 신촌은 대중음악을 하는 예술가들이 설 수 있는 무대였어요. '음악 도시, 부평'의 찬란했던 시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음악을 좋아하는 아내 이씨가 중학생 때부터 모은 레코드판 300장으로 가게를 시작했다. 그때 그 시절 클럽처럼 작은 무대와 주크박스를 꾸몄다. CCR, 레드 제플린, 톰 존스, 비치보이스, 마마스앤파파스... 1960~1970년대 추억의 팝송을 타고 매일 밤 추억과 낭만이 흐른다. 소문을 듣고 귀한 앨범을 기부해 준 사람도 있었다.
"시절 참 좋았어. 그때 여기는 낭만 풍년이었지. 젊을 땐 그런 날이 영원할 줄 알았어요. 무언가 그리울 때 여길 와요." 오랜만에 펍을 찾은 한 고객이 속내를 털어놓자, 밤늦도록 대화가 이어진다. "그땐 어딜 가든 음악이 들렸으니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트위스트 춘 게 신촌 사람들일걸."
바운스 바운스. 그 시절 추억 얘기에 가슴이 요동친다. 음악 한 곡에 웃고 음악 한 곡에 눈물짓는다. 음악의 힘이다. 펍 캠프마켓은 지금 '낭만이 풍년'이다.
역사 한컷, 인천의 기억
애스컴 시티 앞동네, 신촌. 이름처럼 일자리를 찾아, 꿈을 좇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새 마을'이다. '시티'라고 이름 붙였을 만큼 거대한 미군의 땅에서 나온 달러는 도시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동력이었다. 애스컴 시티로 만나서 캠프마켓으로 이별하게 된 부평미군 기지는 부평 사람들에겐 생계의 터전이자 아픔의 공간이다.
질곡의 세월을 지나 시민의 힘으로 되찾은 캠프마켓은 이제 시민들의 쉼터, 시민들의 문화 지대로의 변신을 시작한다. 굿바이 애스컴 시티. (도움말 박명식 스토리텔러/부평문화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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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영상 보기 (https://youtu.be/ZO6yJlCIOjw)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2년 9월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