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메마른 옥수숫대를 기계로 분쇄해서 갈아엎는다고 했다. 검불이 퇴비가 되도록 하는 작업이었다. 일일이 손으로 뽑고 치우는 과정이 사라졌으니 남편의 얼굴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금 나와라 뚝딱. 수북이 쓰러져 있는 옥수숫대가 기계를 거치자 가루가 되었다. 기계의 힘이란. 며칠은 땀을 흘리고 수십 번 허리굽히기를 해야 될 일이 일순간에 해결되었다. 그러나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손 문제는 점점 커지고 있다.

농촌의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 외국인 노동자가 공백을 메우고는 있지만 하루 일당 15만 원을 능가하는 부담은 농부들의 한숨을 깊어지게 할 뿐이다. 차라리 대농이라면 나을 텐데 소작농을 하는 농민들은 인건비에 눌려 허리만 굽는다.
 
 분쇄기가 지나간 옥수수밭
분쇄기가 지나간 옥수수밭 ⓒ 이정숙
  
농촌마다 농기계를 대여하는 센터가 있다. 십여 년 전, 농장이라는 이름으로 농촌생활을 시작한 남편은 농기계를 빌릴 때마다 그 활용법을 배웠다. 기계치에다 못 하나 박기위해 이웃을 불러오던 남편이 농기계를 다루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몸과 기계와 땅이 제각각인 세월을 보내면서 툭하면 기계 고장을 내거나 다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수리하느라 진땀은 더 흘리고, 고랑에 빠지기도 여러 번. 무릎관절, 팔목, 허리가 고질병으로 남았다. 

기계마다 하루 비용이 다르다. 문제는 단 한 시간을 사용해도 하루치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나마도 70대를 훌쩍 넘는 어르신들은 기계 자체를 다루는 법도 모르고 운반의 어려움도 해결이 안 되는 입장이다. 농촌에서는 60대도 청년이다. 남편은 가끔 농기계로 이웃 어르신들 밭도 돌본다. 트랙터를 소유하고부터는 일손 품앗이도 수월하고 아쉬움이 많이 줄었다.

소작농의 어려움을 지켜볼 때마다 할 말이 많아진다. 예를 들면, 농기계 대여 대신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이 농기계를 가져와 필요한 작업을 해주는 시스템이다. 땅 면적과 작업 종류에 따라 비용을 지불하고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을 최소화시키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농기계 순환도 더 용이할 것 같다. 농기계라는 게 그 사용 시기가 비슷해서 때를 놓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계로 할 수 있는 일을 면적이 작아 몸으로 때우는 현실이 답답하다.

옥수수 이야기를 하려다 딴 데로 흘렀다. 제대로 여물지 않아 먹잘 것 없어 보이는 옥수수를 식탁에 올리며 "마지막이야" 남편의 한 마디가 마음을 두드렸다. 여름 내내 우리 식탁과 나눔의 실천을 풍요롭게 하던 친구가 내년을 기약하는 것 같아 살짝 섭섭해진다. 기억에 남겨두고 싶어 드로잉북에 그려 넣었다. '고맙다 친구야.'

옥수수밭을 갈아엎으며 그래도 한 번이라도 더 먹게 하고 싶은 남편의 마음을 어찌 모르랴. 아내와 떼어놓을 수 없는 옥수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옥수수 앞에서 아내의 빛나는 눈빛을 남편은 안다. 내가 볼 수 없는 내 눈빛이다. 그릴 수 없어 아쉽다.
 
 올해의 마지막 옥수수
올해의 마지막 옥수수 ⓒ 이정숙
  
옥수수를 나보다 더 좋아하는 놈은 따로 있다. 하루 저녁이면 수십 개를 넘어뜨려 갉아먹고 튀는. 내 분노에 기름을 붓는 그놈의 이름은 고라니다. 시에서 잡아 준다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옥수수의 절반은 고라니와 멧돼지 그리고 청설모도 합세해서 포식했다. 덩치보다 위장이 몇 배 큰 것은 아닐까 의심해본다. 아니면 먹지도 않고 갉아놓는 게 취미라면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 예의 없고 양심 없는 이것들을 깡그리 처단하고 싶다. 이 시점에서 생태계를 보전하는 일이 뭔지 고민스럽다. 내년엔 옥수수 보존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마련해야겠다.
 
 고라니가 먹어치운 옥수수
고라니가 먹어치운 옥수수 ⓒ 이정숙

덧붙이는 글 | 블로그와 브런치 게재예정


#옥수수#농기계#남편#농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생은 육십부터.. 올해 한살이 된 주부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일상이 특별해지는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