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
사지 말라면 더 사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다. 내가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인 파타고니아를 알게 된 건 2011년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에 내걸었던 광고 때문이었다. 무슨 후킹을 해서 소비자를 우롱하려나 싶어 재미 삼아 둘러봤는데 웃음이 뚝 그치고 말았다. 파타고니아 사람들은 제법 아니, 매우 진지하게 지구를 걱정하고 있었다.
매출의 1퍼센트를 환경을 보호하고 되살리는 일을 하는 단체에 후원하는 것은 물론, 옷이 해지거나 찢어지면 무료로 수선해주는 서비스를 운영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소비자들이 옷을 적게 사야 의류 산업 폐기물이 적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제품의 내구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이유가 적게 사서 오래 입어야 한다는 철학 때문이 라니, 나는 가슴을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겨울도 다가오는데 파타고니아 파카나 한 번 사볼까 했으나, 스물다섯의 내가 선뜻 구입하기에는 높은 가격대라 결국 그 시절에는 사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꼭 팔아주겠노라 다짐하였다.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선 요즈음에는 몇 년에 한 번씩 큰 마음먹고 지갑을 연다.
파타고니아 창업주의 '통 큰 결단'
파타고니아 창업주 이본 쉬나드는 지난 14일(현지시간) 약 4조 2000억 원 가량의 회사 지분을 환경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에 넘겼다. 나는 파타고니아 아이템이 많은 마니아가 아니다. 그렇지만 '지구가 우리의 유일한 주주입니다'를 홈페이지 전면에 내세우며, 파타고니아 전체 지분을 환경단체에 기부하는 창업주 일가의 정신을 높이 산다.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그린 워싱 작업을 하고 매출을 높이려는 기업은 많다. 그렇지만 회사에서 창출되는 재무적인 이익을 모두 지구 환경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이제 나는 옷을 살 때 과잉 생산과 환경오염에 영향을 미쳤다는 소비 수치심을 덜 수 있게 되었다. 파타고니아 제품을 사면 자동으로 지구의 미개발 지역을 보존하는데 돈을 보탤 수 있으니까 말이다.
파타고니아는 우리 가정의 소비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부 의류 예산이 일 년에 한 사람당 이십만 원으로 대폭 줄었다. 상반기에 십만 원, 하반기에 십만 원. 속옷과 양말 같은 소모품을 포함한 금액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의류 예산 제도는 올해로 5년 차다.
최소한의 옷 사기를 실천하기 전 우리는 오히려 옷 쇼핑을 즐기는 부류에 가까웠다. 본디 과소비를 하지 않는 성향이라 명품을 두르거나 해외 직구를 싸게 하는 요령을 꿰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분 전환 삼아 수시로 옷을 샀다.
결혼 이듬해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생활 예산이 빠듯해졌다. 돈이 없다고 옷을 안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살 터울로 둘째까지 태어나자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패스트 패션을 애용했다. 패스트 패션 제품은 어디 나가서 자랑할 만한 품질의 옷은 아니었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꽤 멀끔한 차림새를 연출할 수 있었다.
집이 좁아 대형 왕자 행거로 버티던 시절이었는데도, 4인 가족의 옷이 계절별로 쌓여 있었다. 아기 사진을 예쁘게 찍고 싶어 어른 옷 보다 아기 옷을 더 샀다. 공간 활용 면에서는 꽝이었지만, 나름 재미있게 이런저런 옷을 번갈아 입으며 지냈다.
가끔은 리빙박스 바닥에 깔려있다가 삼 년 만에 발견되는 옷들도 나왔다. 그런 옷은 심각하게 구겨지고, 누런 얼룩이 배여 입지 못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가슴이 아프거나, 안타까움에 잠을 설치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싼 맛에 트렌디하게 사 입고 버려도 그만인 옷이었으니까.
의류수거함에 안 입는 옷을 내놓을 때면 종종 파타고니아의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 광고가 떠올랐다. 양심이 찔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파타고니아 재킷 한 벌 살 돈이면 우리 부부가 두 계절은 쇼핑할 수 있는 액수였다. '좀 더 수입이 늘어나면', '내 집을 마련하고 나면' 같은 핑계를 대면서 쇼핑 줄이기를 미뤘다. 옷 쇼핑은 소액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오락행위에 가까웠기에 쉽게 놓지 못했다.
파타고니아 광고가 시킨대로 했다
옷 쇼핑 습관은 두 아이가 커 가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자연의 눈부신 장면을 아이들이 자라서 볼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환경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훼손되고 오염되어 갔다. 나는 해안 도시인 동해시와 강릉시에서 오래 살았다. 바닷가 솔숲 걷기를 즐겨서 틈틈이 해변을 방문했다. 안타깝게도 해안가의 모래밭은 매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내륙에서 모래를 퍼다 보충해도 금방 허물어져 내렸다.
태풍은 더 자주, 강력한 에너지로 바닷가를 덮쳤다. 해안으로 온갖 쓰레기가 밀려왔고, 교통이 편리해진 탓에 급증한 관광객들은 지저분한 흔적을 너무나도 많이 남겨두었다. 초봄 무렵이면 대형 산불이 수시로 발생했다.
자연 파괴는 책이나 뉴스에서 소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로 내가 살아가는 지역이 실시간으로 망가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취향'이나 '취미'를 빌미로 옷 쇼핑을 대량으로 즐길 수 없게 되었다. 부부 의류 구입비 일 년에 한 사람 당 이십만 원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요즘은 예전에 산 옷을 수선해서 오래 입는다. 일 년 의류비 이십만 원은 아껴두었다가 파타고니아 외투처럼 고가이지만 오래도록 걸칠 수 있는 제품을 사는 데 쓴다. 사실 진짜로 튼튼하고 좋은 옷은 값이 더 나가서 생일 선물 용돈에 의류비를 보태기도 한다. 그래도 예전처럼 애매하게 저렴하고 조악한 옷 네 벌을 사는 것보다 만족도가 높다.
자연 파괴를 최소화하려면 적게 소비하고 적게 배출해야 한다. 소비를 하더라도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생산과 유통, 판매를 하는 기업의 물건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비자는 지구를 살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땀 흘려 번 피 같은 돈으로 소비자의 구매권을 적극 활용하자는 의미다.
나는 파타고니아 같은 극소수의 기업을 제외하고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재생 에너지나 친환경 생산 방식을 채택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고, 환경을 고려하려면 보통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소비자들이 조금 돈을 더 들이더라도 환경의 가치를 이해하는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기업은 생존을 위해 변화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동안 지름신이 스멀스멀 강림하여, 파타고니아 신상 울리에스터 파일 후디를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결국 지웠다. 나에게는 이미 따뜻한 바람막이가 있다.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 나는 파타고니아 광고가 시킨대로 했다. 나중에 바람막이 섬유가 닳아서 못 입을 지경이 되면 다시 파타고니아 매장을 찾을 것이다. 하도 질겨서 교체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