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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지역의 소년들도 당시에 발행되는 어린이 잡지, 신문 등을 구독하며 동요나 소년단 소식 등을 투고하였다. 어린이 잡지는 우리글이라 나이가 어린 소년이 읽었다면, 신문은 고학년층과 보통학교 졸업생이 읽었다.

조선일보는 1923년 8월부터, 동아일보는 1924년 2월부터 울산에서 언양지역 주재 기자로 보도량이 많아졌다. 1930년까지 조선일보가 언양에 많은 보도를 하다가 그 이후부터는 동아일보의 보도량이 많다. 주재 기자의 활동과 신문 지국의 존재 여부에 따라 달랐다.

1925년 1월 음력 8일(양력 1월 31일) 언양소년단은 언양공보에서 제2회 소년소녀가극(歌劇)대회를 개최하려고 준비하고 공연 수입으로 기근(饑饉) 구제 의연하려 하였다. 대회 개최 여부에 대한 후속보도는 없어 알 수 없다. 언양소년단에서 가극회를 주도했던 신고송이 대구사범에 4월 입학을 하여 대구지역에서 활동을 하였다.

언양 소년들 아침마다 모여 달리기를 하다

1925년 어린이날 경성 천도교 앞 너른마당에는 3700여 명의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어린이는 무궁화동산의 꽃', '희망의 별' 등의 깃발이 휘날렸다. 방정환은 "싹 돋기 시작하는 귀여운 어린이들을 우리는 잘 키우자. 일 년 열두 달 어느 달 어느 날을 어린이에게 감히 등한히 하랴마는 5월 1일이라는 이날 하루를 우리는 특별히 마디를 붙여서 '어린이날'로 기념하고자"한다는 기념사가 있었다. 어린이날 노래와 만세에 이어 고무풍선 6000~7000개를 띄우고 깃발 행진을 하였다.
 
1925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이날 깃발. 출처 :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사업단
▲ 방정환과 어린이날 깃발 1925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이날 깃발. 출처 :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사업단
ⓒ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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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기 행렬용 어린이날 기는 "무엇이나 붉은색이라면 사지를 벌벌 떠는 경찰 당국"에서 불온한 붉은색을 썼다고 사용을 불허하였다. 이때부터 어린이날 노래를 불렀다. 1925년부터 부르던 어린이날 노래는 스코틀랜드 민요 멜로디에 맞춰 지은 '야구가'에 방정환이 다음과 같은 노랫말을 지어 넣은 것이었다.

<1절> 기쁘고나 오늘날 5월 1일은 /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일세 / 복된 목숨 길이 품고 뛰여 노는 날 / 오늘이 어린이의 날
<후렴> 만세 만세를 같이 부르며 /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 아름다운 목소리와 기쁜 맘으로 / 노래를 부르며 가세
<2절> 기쁘고나 오늘날 5월 1일은 / 반도 정기 타고난 우리 어린이 / 길이길이 뻗어날 새 목숨 품고 / 즐겁게 뛰어노는 날

 
. 어린이날이 되면 떼창으로 거리를 행진하며 불렀던 어린이날 노래 (출처 : 동아일보(1925.04.30.)
▲ 1925년 어린이날 노래 . 어린이날이 되면 떼창으로 거리를 행진하며 불렀던 어린이날 노래 (출처 : 동아일보(1925.04.30.)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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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어린이날 날짜가 바뀌면서 가사 중 "5월 1일"은 "어린이날"로, 후렴의 "만세 만세를 같이 부르며"는 "동무여 동무여 손을 잡고서"로 바뀌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린이날 노래인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은 윤석중 작사·윤극영 작곡으로 1948년부터 부르게 되었는데, 1920년대부터 동요창작을 개척하던 작곡가 윤극영이 만주에서 광복된 고국에 돌아와 만든 첫 번째 동요라고 한다.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1925년 5월 1일 오후 4시경 언양소년단원들은 청년회관에 모여 시내 거리를 줄지어 행진하며 수천 장의 선전문을 뿌린 후 6시경 만세삼창으로 행사를 마쳤다.

언양 소년단은 5월 12일 경 조기회(早起會)를 조직하여 매일 아침 4시부터 30여 명이 청년회관에 모여 운동으로 시내를 한 바퀴 돈 후에 장거리 경주를 했다. 체력 향상에 효력이 있어 마을 유지들은 환영하였다. 조기회 활동은 언양보다 중남면 신화리에서 1923년 10월부터 있었다. 언양조기회 소식은 <어린이> 독자인 신고송 등의 작문과 편지에 의해 1925년 봄부터 알려졌고, 1925년 7월 울산에 온 방정환도 언양의 소식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야기꾼 어린이 운동가 방정환

어린이 운동가 방정환은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사위이다. 방정환이 1923년에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펴낼 당시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준다"라고 선전해도 18명이 신청할 만큼 인기를 끌지 못했다. 방정환이 구연동화를 하며 열심히 선전하고 독자 퀴즈를 내어 정답을 맞힌 어린이에게는 상품을 주고 독자를 초대하는 행사를 했으며, 방정환 자신이 광고문구를 작성하는 등 발행인으로서 활약을 하자, 점차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하여 10만 부 잡지가 되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 명이었다.

이야기 재주가 뛰어난 방정환의 동화구연은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 일본 경찰의 의심을 받아 감옥에 갔을 당시에도 죄수들에게 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해줘서, 슬픈 이야기를 하면 몰래 이야기를 듣던 간수들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고, 나중에 방정환이 석방될 때, 다른 죄수들과 간수들이 그를 못 가게 막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양산 출신 이원수는 동화구연을 하는 방정환의 모습에 감명받고 아동문학가가 되었다고 한다. <어린이> 독자들이 어린이에 투고하면서 작가도 등단하였다. <어린이> 잡지를 읽고 많은 어린이가 성장하였다.

방정환은 울산과 적지 않은 인연이 있다. 추전 김홍조의 아들인 김택천의 자서기(自敍記)에 1924년 6월 선생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한 달간 함께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동요와 동시를 강습하고 동시 작가 서덕출을 사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1925년 7월에 울산성우회가 주최한 동화동요대회에 참석해 특강을 했다.

소파 방정환은 언양과 울산지역 인물과 인연이 있었다. 장인 손병희는 1856년 수운 최제우 선생이 수도했던 양산 내원사를 1909년 방문하여 기도하고 통도사를 들렀다. 당시 내원사와 통도사 큰 바위에 근 행적을 기록한 바위가 있다. 언양 출신의 정인섭과 같이 방정환은 어린이 운동단체 색동회를 일본 동경에서 1923년 5월 1일 창립하였다. 방정환은 <어린이> 잡지를 통해 당시 어린이들과 소통하였다. 순한글잡지이기에 한문을 모르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 읽기에 좋았다.

신고송이 잡지에 언양소년단 조기회 활동을 전한 곳도 <어린이> 잡지였다. 그리고 "그, 어여쁜 신년호가 나의 책상 앞에 나타날 때 내 마음은 항상 기꺼워집니다. 소파 선생님의 우리 위해 노력하심에는 무어라고 감사할 말씀 없습니다. 유익하게 재미있는 이솝 이야기를 좀 더 많이 내주십시오"(경남 언양소년단 신고송. 1924년 2월 15일)라는 부탁도 하였다.

울산에 살던 서덕출도 <어린이> 잡지를 창간 7주년을 축하하는 글을 보냈다. "<어린이> 잡지는 정말로 어머니보다도 아버지보다도 어린 사람들의 심정을 잘 보살펴 주었고, 힘없는 동무들에게 원기를 돛과 주었다는 것을 나는 오늘에 와서 말씀치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린이>의 애독자였던 서덕출(1907~1940)은 1925년 <어린이> 4월호에 '봄편지'가 당선되고, 윤극영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 불리고, 1927년 10월 방정환에 의해 그의 장애 소식이 알려짐으로써 전국적인 인물이 됐다. 신고송과 서덕출은 <어린이>를 통하여 문학 활동을 하였다.

방정환 언양을 방문하다

1925년 7월 15일 오후 8시 울산성우회(蔚山城友會) 주최, 동아일보울산지국 후원으로 <어린이> 주간 방정환과 정순철을 초빙하여 소년문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울산공립보통학교에서 윤철한의 사회로 정순철의 흥미 있는 독창을 들었다. 방정환은 '신생의 도'라는 강연을 하여 200여 명의 관중으로부터 큰 갈채를 받았다.

7월 16일 오후 8시 울산성우회, 울산소년회, 병영소년회, 언양소년회의 후원으로 열린 "현상소년소녀동요동화대회"가 울산공보 대강당에서 있었다. 청중은 600여 명이었다. 대회의 심사위원은 방정환, 정순철이었고 참가자는 25명이었다. 동화 부문은 1등 <눈 어두운 포수> 차종철, 2등 <용감한 소녀> 박영명, 3등 <흉년과 독수리> 서덕봉, <효의 평화> 김아단이었다. 동요 부문은 1등 <내곳동모> 조덕희, 2등 <눈먼 닭> 김해성, 3등 <백일홍> 서계봉, <갈대살> 황덕송(황덕수), 등 외 <별> 한봉금, <참새노래> 김말돌이었다. 당시 "방정환씨의 소년운동은 대중본위(大衆本位)가 아닌 사회성분(社會成分)의 극소수를 점령한 '조아(부르주아)' 계급 소년을 위하야 의의(意義)잇는 운동이라고 평론하는 인사도 불소(不少, 적지 않다)하얏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신고송은 언양소년단원으로 활동하던 17세 때 1924년 2월 15일 <어린이>에 독자 편지를 보냈다. "그 어여쁜 신년호가 나의 책상 앞에 나타날 때에 내 마음은 항상 기꺼워집니다. 유익하게 재미있는 이솝 이야기를 좀 더 많이 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소파 방정환이 마산에 왔다가 갔디는 소식을 듣고 섭섭하였다면서 "우리 언양에도 꼭 한 번 와 주십시오"라고 하자 방정환이 "가 보고 싶습니다"라고 화답한 적이 있었다(<어린이> 2권 4호, 1924.05). 그 다음에 신고송이 소년단 활동으로 "밧버든 일주간"을 <어린이> 2권 5호(1924.05)에 실렸다. 신고송의 데뷔작이었다. 신고송은 <어린이>에 언양소년단에서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는 조기회를 한다는 소식을 올렸다. 소파는 그 글을 읽었다. 또 언양소년단 회원들의 작문과 편지를 늘 보고 재미있게 여기고 있었다.

행사 후 아동문학가 신고송이 지도하는 언양조기회를 방문했고, 하지만 신고송은 대구로 공부하러 가고 없었다. 방정환은 언양을 방문하여 그때 받은 잊지 못할 감동을 <어린이> 3권 9호(1925년 9월)에 "씩씩한 동모들 언양의 조기회"이란 제목으로 남겼다.

언양에 온 방정환은 이렇게 기록했다. 

"언양의 참외나 호박만큼씩 한 작고, 예쁘고, 물에 씻은 듯이 깨끗 한 것으로, 강에나 길에나 마당에나 어디 없는 곳 없이 돌들이 가뜩가뜩 쌓여 있습니다. '하늘에는 별도 많다'고 하지만, 언양에는 별보다도 돌멩이가 몇 갑절 더 많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담을 쌓은 것도 돌멩이뿐이고, 벽을 쌓은 것도 돌멩이뿐이고, 방축을 쌓아도 돌멩이뿐이고, 땅을 파도 돌멩이뿐이어서 아주 흙이 귀한 곳입니다. 산 좋고, 바람 좋고, 땅 좋고, 물맛이 좋으니까, 곡식이 좋아서 여기 물 여기 쌀로 지어주는 밥맛이 어떻게 그렇게 좋은지 몰랐습니다. 돌멩이 많고 밥맛 좋은 곳이 어디냐 하거든 '경상도 언양'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언양은 하늘의 별보다 돌멩이가 많은 동네로 흙이 귀한 마을로 느꼈다. 산 좋고, 바람 좋고, 땅 좋고, 물맛이 좋아 밥맛이 좋은 동네라고 하였다. 지금도 개발되지 않은 마을의 골목길에는 돌담이 있다.

방정환은 첫날 언양공립보통학교 강당에 가서 3시간 동안 강연을 하였다. 당시 언양소년단과 불교소년단은 모두 다른 곳 소년회와 같이 공휴일마다 모여서 토론도 하고, 동화회도 하는 외에, 새벽마다 5시에 일제히 일어나서 한곳에 모인 다음, 겨울에나 여름에나 행렬을 지어 동네 바깥까지 도보로 다녀와서 식전 운동을 하고 헤어졌다.

새벽 5시만 되면 먼저 임원이 일어나서 나팔을 불고, 그 나팔 소리를 군호 삼아 골목골목 집집에서 어린이들이 이불 속에서 뛰어나오는데, 원래 조그마한 시골 읍이라 나팔 소리가 이른 새벽 공기를 헤치고 온 시골 집집마다 돌리는 고로, 소년단원 아닌 어른이나 늙은 노인까지라도 일제히 잠이 깨어서 '어린이들이 일제히 일어나는데, 우리가 늦게까지 자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하고 모두 다 일어나게 되었다.

12, 13세 밖에 안 되는 조그만, 아주 조그만 어린 소년이 남천 다리 위에서 나팔을 불렀다. 나팔 소리에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뛰어오는 불교소년단 동무들이 남천 다리목 너른 마당에 20여 명이 모였다. 언양공립보통학교 앞에서 나팔을 불어 언양소년단원들이 모였다.

언양소년단은 보통학교 앞 청년회관이요, 소년회관인 자기네 회관 마당에서 나팔을 불어 단원을 깨워 모으고, 한편에는 벌써 일찍 모여온 단원들이 운동장에 잡풀을 열심히 뽑았다. 새벽마다 모일 때마다 조금씩 뽑는 것이 지금은 훌륭히 테니스[정구] 운동장 한판은 만들었다. 새벽 노동의 결과로 기념할 운동장이 생겼다. 언양소년단 출신 독립운동가였던 이동개는 정구소년 선수로 활약하여 우승을 여러 번 했다.

방정환이 온 날에 소년회관 앞에 60여 명이 모였다. 한 학생의 호령으로 대를 지어 달음질로 큰길을 나아가 동리를 꿰뚫고 "하나둘, 하나둘" 소리를 내며 읍 바깥 퍽 먼 곳까지 달음질로 뛰어가는데, 7세 8세의 어린이들도 뒤떨어지지 않고 달음질했다. 행렬을 지어 동네 바깥까지 달음질로 뛰어갔다. 줄창 달음질로 날마다 가는 예정의 곳까지 다녀와서, 아침 교련 운동을 마치고, 그냥 그대로 마당에 선 채로 방정환에게 이야기를 청하였다.

방정환은 한없이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고, 또 외국 소년들의 지내는 이야기와 한국 소년들이 어떻게, 어떻게 커 가야 할 것인가를 정성을 다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이후부터 어느 때든지 두 단체가 연합하여 한데 모여서 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뜻을 밝혔다. 그다음 날에도 또 5시 나팔 소리에 모여서 전날 같은 일을 마치고, 방정환은 새로운 훈련 무용을 가르쳐 주었다.

방정환은 언양 소년들에게 "모든 것이 모두 쇠잔한다고 하여도, 온갖 것이 모두 망한다고 하여도, 언양에는 새로운 싹이 잘 크다 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뛰면서 커 간다고 할 것입니다. 언양의 모든 사람에게 새벽마다 새로운 부지런과 새로운 기운을 넣어주고, 격려하면서 씩씩하게 커 가는 두 소년단의 어린 동무들이여! 꾸준히 씩씩하게 장성하소서"라는 격려의 글을 남겼다. 방정환의 격려를 들었던 어린이들은 언양과 울산지역의 작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얻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

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언양소년단, #언양불교소년단, #언양 조기회,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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