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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지역 소년소녀연합회를 결성하다(1925년 8월)
 
- 오월회가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졌지만 어린이 운동은 계몽주의적 경향이 있었다.(동아일보, 1926.06.14)
▲ 1926년 어린이날 결의문 - 오월회가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졌지만 어린이 운동은 계몽주의적 경향이 있었다.(동아일보, 192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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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지역 소년소녀운동 지도자들은 1925년 5월 24일 경성에서 열린 '경성소년지도자연합 발기총회' 소식을 당시 신문보도를 통해 접하고, 오월회 주도의 아동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언양지역은 1920년대 초반부터 상북면의 천도교의 민족주의 계열과 언양지역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회운동 단체가 있었다. 하지만 두 세력이 충돌한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천도교연합회와 가까워 오히려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언양지역 소년들은 잡지 <어린이>를 통해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5년 8월 전후로 '언양소년소녀연합회'를 결성하여 영남산무리 일대의 소년운동단체 결속력을 강화하였다. 이 당시 참가한 지역 소년운동 단체 현황은 알 수 없으나 언양, 중남(삼남), 상남하북, 두북(두서두동), 삼동지역의 단체들이 참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언양소년소녀연합은 결속력 강조 차원에서 제1회 영남정구대회를 8월 15일과 16일 2일간 언양체육구락부, 언양청년회와 함께 공동 주최하여 언양공보 코드에서 열렸다. 이 정구장은 언양소년단 조기회원들이 아침 모임에서 풀과 돌을 제거하여 만든 것이었다. 참가는 3인 1팀으로 참가비 3원, 총 12팀이 참가하여 성황리에 대회가 개최되었다. 최종우승은 언양팀이었고 상품은 우승기였다.

당시 이동개는 정구를 매우 잘하여 우승을 한 적이 몇 번 있어 우승기가 집에 있었다고 아들은 증언하였다. 1938년 8월 7일 양산통도사 불교전수학교 주최로 제2회 남조선개인정구대회가 열렸다. 2회전에 붙은 통도사팀과 언양팀의 시합은 듀스 어게인이 12번이나 될 정도로 치열했다. 이때 이동개는 언양팀으로 3대 4로 승리하였지만, 우승은 하지 못했다.

1925년 10월 언양소년단은 창립 3주년을 기념하여 상남면, 하북면, 중남면 등 각 면에 취지 선전의 순화 강연을 하였고 10일 오후 8시부터 언양청년회관에서 기념 가극 및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언양소년단이 상북면 지역과 중남면 지역까지 소년단 선전과 순회 강연을 한 것은 이 지역에 소년운동 단체가 있었지만, 그 활동이 다소 미흡했기 때문인 듯하다.

경성 오월회는 1925년 9월 23일 제주소년연맹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지역 소년연맹을 조직화하였다. 1926년 3월 12일 오월회 부흥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집행위원으로 이원규 외 6인을 선정하였다.

1926년 정월 보름을 맞이하여 두서면의 인보소년단은 가극을 인보시장통에서, 구량소년단은 연극회를 구량리 송정과 두동면 구미리에서 각각 하였다. 소년단의 사정은 창립 이래 남은 서광의 빛을 간신해 보존할 정도로 매우 좋지 않았다. 당시 두서와 두동은 같은 지역이었지만 도로로 인해 동서로 양분되었기에 지역적 분리 개념이 적었다. 그래서 구량소년단이 두동면 구미리까지 가서 연극을 한 것이고 그만큼 적극적 계몽활동을 하고자 한 것이다. 1926년 5월 21일 보성단 극회(普成團劇會)가 언양을 방문하여 언양불교소년단과 언양소년단에게 공연을 하였다.

1926년 5월 어린이날을 조선소년운동협회와 오월회로 양분되어 준비하고 진행되었다. 하지만 순종의 위독으로 민심의 동요가 있을까하여 일제는 일체 집회를 엄금하고 어린이날 옥외 집회를 금지하여 어린이날 기행렬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순종의 승하로 오월회는 어린이날 행사를 음력 5월 1일로 연기하고 각 소년회원 1천여 명을 모아 망곡하기로 하였다. 언양소년소년연합회는 국상(國喪)으로 인하여 어린이날 축하를 5월 말일로 연기하였다. 언양에서는 5월 1일 오전 11시 언양청년회관에서 3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봉도식을 하였고, 울산공보 남녀학생 일동은 선생들과 일제히 망곡식을 하였다.

경성 오월회에서는 1926년 5월 소년단체 현황 통계표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또 회보를 폐지하고 소년운동 잡지 <오월>을 7월부터 창간, 발행하기로 하였다. 잡지 창간호는 내용이 불온하다고 하여 전체가 경찰에게 압수당하여 다시 원고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순종의 장례식을 피해 오월회는 다시 단오날에 어린이날 행사를 <어린이대회>, <어머니대회>, <아버지대회>를 각각 열기로 하였으나 경찰의 금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역에서는 어린이날 행사가 열리기도 하였다.
  
언양지역 소년소녀연맹 결성(1926년 5월)

1926년 5월 30일 언양소년소녀연합회는 임시의장 윤수암(1906년생, 언양공보 6회)의 사회로 제1회 정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가맹단체 11개 중에서 7개 단체가 출석하여 회의가 진행되었다. 언양소녀소년연합회를 '언양소년소녀연맹'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경성 오월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지역 소년연맹 조직화와 연관된 것이었다. 언양소년소녀연맹은 다음과 같이 선언과 강령을 채택하였다.
 
<선언> 어린 무리들아! 모여 오라. 소년군의 깃발 밑으로! 장래의 용사가 되고 제2세대의 주인인 어린이 무리여! 부패한 사회를 돌파하고 평화의 봄나라에 새 백성이 되랴고 우리는 주의, 강령을 굳세게 잡아 언양소년소녀연맹을 이루노라.
<강령> 1. 건전한 청년을 양성함을 기함. 2. 정의와 성실로 사회봉공을 철(哲, 분명히)함. 3. 소년단체 통일을 도(圖, 꾀)함.

 
-소년연맹에서 소년동맹의 결성으로 소년운동도 사회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갔다.(시대일보, 1926.06.06.)
▲ 1926년 언양소년소녀연맹 결성대회 -소년연맹에서 소년동맹의 결성으로 소년운동도 사회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갔다.(시대일보, 192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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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을 개선하여 집행위원은 각 단체별 1명이 배정되어 총 11명으로 하였다. 언양소년단 이동계(1905년생, 언양공보 7회), 언양소녀회 한덕복(1910년생, 9ㆍ10회), 언양불교소년단 방기현(1905년생, 6회, 언양남부노농회[남부농민회]), 언양불교소녀회 1인, 중남소년단 윤수암(1906년생, 6회), 중남소녀회 1인, 중남유년단 1인, 두서소년단 우재식, 두량소년단 1인, 삼동소년단 우재식, 상남소년단 이종인이었다. 검사위원은 김기오, 심수학, 오덕선(11회) 3명이고 상무집행위원은 이동계, 윤수암, 한덕복 3명으로 남자 2명, 여자 1명으로 구성되었다.

언양지역에는 언양소년단, 언양소녀회, 언양불교소년단 3개 단체, 중남면은 중남유년단, 중남소년단, 중남소녀단 3개 단체, 두서면에는 두서소년단과 두량소년단 2개, 삼동면은 삼동소년단, 상남면에는 상남소년단 각 1개 단체가 참여하였다. 현재 상북면에 속하는 하북면의 단체는 없었다. 소년운동단체모임이었는데 언양남부노농회[남부농민회])가 가입한 것이 다소 특이하다. 또 소녀단체에서 언양소녀회의 한덕복과 오덕선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대표를 파견하지 못한 언양불교소녀회, 중남소녀회, 중남유년단, 두서소년단, 두량소년단은 그 활동이 다소 미흡했기에 대표를 파견하지 못한 것 같다. 또는 연합회에서 연맹으로의 변경에 따른 사상, 주의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가 내부적으로 결정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926년 7월 16일 언양청년회와 소년회, 관공서 주최로 여름철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16일 언양 장날을 기호로 각처에서 운집하는 수만군중에게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은 파리잡기[포승, 捕蠅]와 청결(淸潔)하자"와 "매월 1회씩 시민강화를 열자."는 장문의 선전지를 인쇄하여 전 시민, 전 시가지에 산포하였다. 17일 아침 일찍 전 시민이 제1회 대청결을 실행하고 오후 8시에 언양공보 대강당에서 제1회 시민강화회가 있었다.

시민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강당을 채우고 추최측인 아홉 단체에서 "여름철 위생과 일상생활" 강화가 있었다. 주최측 9단체는 아마 언양소년소녀연맹에 가입한 지역 소년단운동단체와 언양청년회인 듯하다. 특히 소년단체에서 출연하여 음악과 아동극단이 있었다. 마침 방학을 맞이하여 귀국한 정인섭의 "백로의 죽음" 동화극을 무대에 공연하였다. 계속하여 자유강좌를 열고 3명의 토론이 있고난 뒤인 12시에 폐회하였다. 당시 정인섭을 색동회를 통해 방정환, 손진태와 함께 어린이 운동을 하였다. 1932년 정인섭, 손진태는 송석하와 같이 조선민속학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 소년 잡지 『어린이』에 비해 『신소년』과 『별나라』는 사회주의적 계급투쟁 노선을 추구한 카프의 지도를 받아 발행되었다.
▲ 어린이 잡지 『신소년』과 『별나라』 표지 - 소년 잡지 『어린이』에 비해 『신소년』과 『별나라』는 사회주의적 계급투쟁 노선을 추구한 카프의 지도를 받아 발행되었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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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8월 12일 오후 연맹사무소에서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상무위원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그때 "1. 집행위원으로 김명진(여, 1910년생, 언양공보 9.10회) , 신근수(1907년생, 8ㆍ10회)를 늘릴 것. 2. 영남정구대회 후원하여 일체 설비를 조력할 것 3. <신소년> 지사를 설치할 것 4. 유리(流離)단체 진상을 조사하여 다음 위원회에서 처리할 것 5. 부담금을 8월 말일까지 완납할 것 6. 음력 8월 중순에 가극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잡지 <신소년>(1923~1933)은 1923년에 창간한 잡지로 <어린이>(1923~1934) 잡지가 흥미위주였지만 은연중에 배일감정을 보여주었다면, <신소년>은 학습중심이었다. 즉 취재가 동요나 동화같은 문학적인 면에서 출발하여 역사 지리 과학 훈화 등은 물론 중학교 입학시험 문제와 답안까지 게재하였다. 다소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여 적어도 보통학교 5, 6학년 이상을 독자로 삼고 있었다. <신소년> 창간사는 '민족'이다 '독립'이다 하는 말 대신에, '장래 조선의 주인이 되어 조선을 다스려 갈 300만 소년'이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신소년>은 이동규(李東珪), 홍구(洪九), 이주홍(李周洪)이 주간이 되면서 계급투쟁의 기치를 들고 <별나라?와 같은 노선을 걷게 된다. 두 잡지는 카프의 지도하에 발행되었다.

언양소년소녀연맹에서 잡지 지국을 운영하겠다는 것은 청소년들의 독서욕구, 지적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의도와 함께 계급투쟁적 경향으로 방향전환을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잡지는 아동들을 계급의식과 건전한 사회도덕으로 교양하는 교과서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정구대회를 후원함은 체육활동을 통한 단체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제2회 영남정구대회는 8월 15에 열렸다.

언양소년소녀연합회의 결성과 언양소년소년연맹으로의 전환은 당시 언양지역의 소년소년운동 단체들이 민족주의적 경향에서 계급주의적 경향인 오월회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볼 수 있다. '언양소년소녀연맹' 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당시 소년운동단체로서 이름은 있으나 활동이 미미한 단체들은 혁신 총회를 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

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언양소년운동사, #울산 소년운동사, #언양소녀소년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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