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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다니는 미국 초등학교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행사가 열린다는 초대장을 받았다. 학교가 파한 금요일 밤에 가족들이 모여서 학교 체육관 강당에서 영화를 함께 본다고 한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즐거운 경험이 될 거 같아서 물었다.
 
 학교 영화의 밤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
학교 영화의 밤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 ⓒ 류동협
 
"영화 보러 학교에 갈래?"
"무슨 영화야?"

"엔칸토라는 디즈니 영화래."
"그 영화는 좀 별로야."

"그래? 팝콘이랑 간식도 공짜로 나눠준다는데?"
"그럼 갈래."


영화보다 간식에 마음이 끌린 아이는 흔쾌히 가겠다고 동의했다. 아이는 예전에도 학교에서 기획한 행사에 몇 번 가봐서 익숙했다. 예술의 날 행사 때는 에밀리 카(Emily Carr)라는 화가에 대해 배우고, 그 화풍을 따라서 크레용으로 자연의 숲을 마음껏 그려보며 재밌는 시간을 보냈었다.

아이들 멋대로 즐기는 영화

코로나 때문에 몇 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이벤트에 대한 갈증이 컸던 이유 때문일까? 약속한 시각보다 약간 일찍 도착했는데 벌써 아이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아이랑 2학년 때부터 단짝 친구였던 알리를 주차장에서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고, 같은 축구팀에서 뛰는 알렉스랑 티머시도 만났다. 게임 친구 콜린, 책 친구 이샨도 영화 보러왔다. 영화관에서 만나는 낯선 타인이 아니라 평소에 알던 친구들을 만나서 그런지 아이들이 신나게 떠들고 노느라 정신없었다.

 
 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영화의 밤' 행사장에 아이들이 잠옷을 입고 담요를 가져와 즐겁게 놀고 있었다.
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영화의 밤' 행사장에 아이들이 잠옷을 입고 담요를 가져와 즐겁게 놀고 있었다. ⓒ 류정화
 

유니콘 인형, 곰 인형을 안고 돌아다니는 친구들이 먼저 보였고, 스타워즈 복장, 마인크래프트, 거북이, 엘사, 축구공 잠옷을 입은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와 체육관은 '파자마 파티장'이 되고 말았다.

어떤 아이는 여행 가방까지 챙겨와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우리 아이도 잠옷을 입혀서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잠시 후회가 되었다. 아이는 이제 3학년이 되었으니 학교에 잠옷 같은 건 입고 가기 싫다고 했는데, 막상 편한 잠옷 차림의 친구들을 보니 마음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친구들 잠옷을 품평하며 떠들기에 바빠 보였다. 대형 매트리스에서 이불을 깔고 뒹구는 아이들로 시끌벅적했다. 영화를 보러온 건지 그냥 체육관에서 친구들이랑 장난을 치러온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파티에는 음식이 빠질 수 없는 법이다. 학부모 교사 연합회(parent-leacher organization) 자원봉사자들이 체육관 한쪽 구석 테이블에서 나눠주는 간식을 받아먹으려고 줄 선 아이들로 붐볐다. 줄이 끝도 없이 삐뚤빼뚤 늘어섰지만, 순서를 어기고 새치기하는 아이도 거의 없었다. 결국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간식 테이블이 텅 비고 말았다.

복도에서 다시 팝콘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교무실에 있는 전자레인지로 팝콘을 튀기고 있었다. 아이들이 다시 바쁘게 돌아다녔다. 갓 튀긴 팝콘을 먹으러 복도에 늘어선 아이들이 영화관 안까지 이어졌다. 일반 영화관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마치 집에서 영화를 보듯이 아이들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그걸 즐기고 있었다. 배가 불러 노곤했는지 매트에서 곯아떨어진 아이도 여럿 보였다.

집에서 저녁까지 다 먹고 왔는데도 우리 아이는 공짜로 얻어먹는 간식에 더 눈독을 들였다. 옥수수 알레르기 때문에 팝콘을 못 먹는 아이가 약을 먹더라도 오늘은 반드시 먹겠다고 우겼다. 팝콘 말고 다른 과자를 권해봤지만 아이는 고집을 좀체 굽히지 않았다. 결국 아이의 간곡한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허락해줬다.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나누어 먹는 '재미'마저 포기할 수 없었던 게다.

엄청난 인원이 몰려와 영화 흥행은 성공했지만 부족한 점도 많았다. 스크린이 너무 작았고, 그나마 작은 화면도 농구대 그물망에 가려서 다 보이지도 않았다. 음악이 중요한 영화였는데 스피커 출력이 낮아서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엉성하고 부족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코로나가 무시무시하던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 할 일을 지금 하고 있으니까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교장 선생님이 나와서 인사말도 하고 조용히 관람하길 신신당부했건만, 아이들은 먹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쉿! 조용히 하라는 소리가 나면 잠시 잠잠해졌다가 아이들이 웅성거리길 여러 차례 반복했다. 화장실 다녀오는 아이, 과자를 더 먹으러 가는 아이,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고 자주 일어나는 아이를 구경하느라 심심할 틈이 없었다. 뒷자리에 앉은 학부모들은 영화보다 아이들 구경하는 걸 더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어수선한 체육관에서 우리 부부는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최대한 영화를 즐기려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앞쪽 어디선가 아이들이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이들끼리 싸움이라도 난 걸까? 자세히 귀를 기울이니 아이들이 노래 "입에 담지마 브루노(We Don't Talk About Bruno)"를 목청이 터지게 따라 부르고 있었다.

마법처럼 영화관은 순식간에 노래방으로 변했다. 아이들이 부르는 합창으로 체육관이 꽉 차게 울려 퍼졌다. 하얀 러닝셔츠의 소년도 빙글빙글 춤추고, 유니콘 인형과 베개들이 체육관 위로 마구 날아올랐다. 부모들은 그 신기한 광경을 비디오로 찍기에 바빴다.

 
 영화를 보던 도중에 빠져나와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
영화를 보던 도중에 빠져나와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 ⓒ 류동협
 

영화를 보는 도중에 우리 아이가 벌떡 일어나 복도가 아닌 바깥문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놀라서 재빨리 아이를 찾아 나섰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진 운동장에서 아이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운동장 놀이터에서 그네와 놀이기구를 타며 친구들과 놀고 있는 아이를 겨우 발견하고 안심했다. 아이는 밤늦게 밖에서 노는 게 좋았는지 평소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어떤 아이는 별똥별을 봤다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눈이 부시게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여기 나와서 뭐 해?"
"영화가 지루해서 나왔어."

"이제 영화는 안 볼 거야?"
"또 들어가서 볼 건데, 지금은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좋아."


한참 놀던 아이는 내 손을 잡고 다시 영화관으로 들어왔다. 영화가 막바지로 향해가고 있었고 아이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공동체가 있어 든든하고 행복했던 밤

거의 영화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화재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황급히 놀라서 일어난 아내가 아이의 손을 꽉 잡고 출구로 이끌었다. 우리는 아이를 안심시키며 밖으로 안전하게 나올 수 있었다. 경고음에 놀란 아이들도 많았지만 큰 소란은 없었다. 부모들이 침착하게 대응하고, 아이들이 소방 훈련에서 배운 대로 행동해서, 모두 안전하게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영화 엔칸토를 보며 노래를 따라부르는 아이들
영화 엔칸토를 보며 노래를 따라부르는 아이들 ⓒ 류동협
 

학교 공터에서 오랜만에 만난 아이 친구 부모들과 도란도란 인사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학교생활, 건강, 방학에 있었던 일 등을 얘기하며 상황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화재경보기가 꺼지고 다시 들어간 체육관은 난장판이었다. 급히 빠져나오느라 정리하지 못한 물건과 음식물 쓰레기가 마구 널려 있었다.

누군가의 실수로 화재경보기가 울렸다는 교장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비로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함께 강당에 널려 있던 쓰레기를 깨끗이 치우고 돌아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소방차도 출동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이번 행사는 9월 학기 시작 후에 정신없이 달려온 아이들이 숨을 고르고 쉬어갈 틈을 준 자그마한 '축제'이자, 아직도 끝나지 않은 팬데믹 상황에서도 서로 돕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공동체가 있다는 걸 확인한 소중한 밤이었다. 작은 소란도 축제 속에 승화되어 해프닝으로 기억될 것만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망가졌던 공동체의 삶이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었다. 매일 아침 등굣길에 아침 인사를 나누던 이웃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면서 더욱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도 학교에 다른 행사가 있다면 우리 가족이 기꺼이 돕고 참여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이다.

영화도 보고, 별도 보고, 친구도 보고 돌아온 아이는 아주 행복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아이 곁에 잠시 누워 그날 있었던 일을 함께 나누었다.

"뭐가 제일 좋았어?"
"음… 공짜 팝콘."

"그리고 또 없어?"
"친구들! 친구랑 있으면 뭘 해도 다 좋아."

덧붙이는 글 | 류동협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육아#공동체#영화#축제#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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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협 기자는 미국 포틀랜드 근교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육아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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