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지만 반전인생을 살고 있는 혹은 반전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편집자말] |
방바닥에 무릎을 대고 엎드린 채, 26개월 아기가 먹다 흘린 우유를 닦고 있었다. 말을 태워 주려는 줄 알았는지 쪼르르 달려와 등에 매달리고는 "엄마! 말~ 엄마~ 말~" 했다. 기꺼이 거실을 서너 바퀴 돌고 내친김에 비행기까지 태워 주려 방바닥에 누웠는데, 거실 정면 책장에 걸려 있는 금빛 메달이 눈에 띄었다.
열 살인 둘째 아이가 지난 6월에 열린 태권도 대회에서 받은 상이었다. 그 옆에는 남편이 마라톤을 완주하고 얻은 메달과 헌혈 100회를 채워 받은 훈장이 놓여 있다. 한 칸 아래 책장에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 온 상장과 남편의 승진 임명장이 나란히 꽂혀 있다. 며칠 후면 큰아이의 유도 1단 증서도 꽂힐 자리였다. 풍선에 바람 빠지듯, 아기와 신나게 놀던 마음이 한순간 가라앉았다.
아이 키우고 복귀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14년 전, 친구들보다 이른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에 큰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키워 줄 사람이 없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때 나는 계약직이었고, 정규직이었던 남편보다 월급이 적고 불안정했으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했다 복학했을 때처럼, 1년만 아이를 키우고 복귀하면 된다고 가벼이 여겼다.
1년 동안 자란 아기는, 여전히 젖을 먹고 기저귀를 찼다. 1년 더 쉰다고 무슨 일이 있겠어? 싶었다. 말이 트이고, 걷기 시작하고 기저귀를 떼고 나니, 아이가 혼자면 외롭다는 말이 들렸다. 세 살 터울로 둘째를 낳고 길러도 내가 무엇도 하지 못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친구들이 공부를 더 하러 유학을 떠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고, 회사에서 진급 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때마다 나만 제자리인가 싶어 불안해지곤 했지만, 빨리 아이를 키워놓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무조건적 긍정이 남아 있었다. 틈틈이 책을 읽었고 밤마다 공부를 하면서 '내일'을 준비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란 나의 의지는 순진한 기만이었을까. 첫째가 아홉 살, 둘째가 여섯 살이던 해, 전에 같이 일하던 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시 일하고 싶다고 종종 말했었는데,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오래 쉬어 하던 일로 바로 복귀하는 건 어려울 테니, 이렇게 현장 분위기를 익히란 말을 덧붙였다.
해당 업무는 간단한 서류 정리와 문서작업, 청소 정도였는데, 대학생 때 전공 관련 현장 경험을 쌓으려 무급으로 자원해서 하던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험을 봐 국가자격증을 취득하고, 3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니. 마치 아이를 낳기 전에 일하던 나는 사라진 것만 같았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했다 복학하면 3학년이던 것처럼, 아이를 키우고 일터로 돌아가면 3년 일한 경험을 살려 시작할 줄 알았던 내 생각과 현실은 많이 다르다는 걸 그때 알았다.
둘째가 8살이던 2020년 7월 셋째를 낳고 시시때때 우는 아기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웠다. 코로나로 집에서 온라인 학습을 하는 첫째와 둘째 아이의 선생님 노릇까지 하다 보면 매일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을 보내면, 나의 다른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다.
출산과 육아로 끝났다 생각한 30대
아기가 낮잠이 들고, 둘째 아이의 이름이 금빛으로 박힌 상장을 펼쳐 보았다. 아이들이 자라서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 상까지 받으니 흐뭇하고 기쁘지만, 마음 한편엔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있었다. 필연적으로 육아의 목적은 떠나보냄이기에,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나 싶어져 기분이 가라앉았다.
상장을 제자리에 두고 식탁으로 가 읽던 책을 펼쳤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 걸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만 둥둥 떠다녔다.
그때 카카오톡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지난번 축제 때, 타로 부스 운영한 거 돈 입금 됐더라고~ 수고했어!" 그날 넷이 같이 했는데 10만 원을 받아서 똑같이 나누어 나에게도 입금해 준 거였다.
타로를 함께 배웠던 동네 언니들이 축제에서 타로를 봐 주는 부스를 열자고 했을 때, 아기를 봐야 해서 시간을 약속하기 어렵고, 상황 봐서 참여하겠다고 했다.
아기는 자신들이 돌아가며 봐 줄테니 편하게 오라고 했고, 그 마음에 기대어 가벼운 마음으로 축제가 열리는 공원에 갔다. 언니들은 아침 일찍부터 짐을 챙겨 나와 타로 부스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나는 아기하고 오다가다 잠깐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과 타로카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메시지 창에 떠 있는 내 몫으로 보내진 2만5000원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이 돈을 받기가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기 키우면 다 그렇지~ 애도 보고 타로도 보느라 수고 많았어~"라고 답이 왔다. '아기 키우면 다 그렇지'라는 말을 여러 번 되뇌어 보았다. 아기를 키우면서 물리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 지금 내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언니들은 언제나 그랬다. 뭐든 배우러 다니기 좋아하던 내가 셋째를 낳고 집 안에만 있을 때, 동네에서 타로 워크숍을 열고 같이 배우자고 손 내밀어 주었다. 아기를 데리고 수업에 참여하기 어려워 고민했더니, 먼저 배웠던 언니가 아기 돌보미를 자처하면서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여 수업을 듣기도 했다.
10년 넘게 아이 키우는 것만 하던 내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보려 했던 것도 언니들 덕분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간 시간에 함께 모여서 비폭력대화 워크숍을 듣고 책을 읽고 공부했다.
집에서 먼 곳에서 열리는 글쓰기 수업을 듣고 싶어 할 때, 언니들이 아이들을 봐 줄 테니 다녀오라고 등 떠밀어 주었다. 아이를 빨리 키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는 대신, 아이를 키우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2만5000원으로 뭘 할까. 책도 사고 싶고, 언니들과 맛있는 밥을 먹고 싶고, 봐두었던 타로 카드를 사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는데 한 언니가 다 같이 모여 맛있는 술을 먹으면서 타로를 하자고 했다. 모두가 너무 좋겠다면서, 어서 날짜를 잡자고 하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언니들도 나처럼 고요한 밤에 모여 타로카드로 삶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사실, 찬바람이 불면서 출산과 육아밖에 한 것이 없는데 삼십 대가 끝나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데 이미 내 곁에는 사십 대를 살고 있는 언니들이 있었다. 마흔 다섯 살 전에 운전면허증을 따 새로운 발이 생겼다며 좋아하고, 태어나 처음으로 일주일 단식을 해보고 얼마나 좋았는지 얘기하면서 같이 하자는 언니들.
얼마 전에 태권도 1단을 딴 언니는 아들과 함께 대회에 함께 참여하고는 "아주 멋진 경험"이었다고 했다. 언니들의 사십 대에 나의 사십 대를 겹쳐 보면서 어떻게 살지 상상하다 보니 내가 무엇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겠구나 싶어졌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