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는 각 지역 소년회(少年會) 활동을 통해 성장한 십 대 소년들이 <어린이>, <신소년>, <별나라>와 같은 아동 문예지의 현상 문예를 통해 등단하여 소년 문단을 주도한 '소년 문예가'의 시대였다. 언양지역 소년·소녀들도 조선어 잡지를 통해 각 지역의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소식도 전하고, 또한 자신들의 작품을 투고하였다.
1925년 8월 7일 대구소년단이 무산 아동 야학 개설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언양 협성여관에서 순회 음악(音樂) 무도(舞蹈) 공연을 하여 동정금 28원을 모금하였다. 당시 대구사범에 신고송이 재학(1925.4.4.~1928.3.25.) 중이었고 당시 동요 작가 윤복진(1907~1991)이 대구소년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24년에 윤석중이 만든 <기쁨사> 동인으로 신고송, 서덕출, 윤복진 등이, 1926년 대구에서 만든 <등대사> 동인으로 윤복진, 신고송, 서덕출 등이 같이 활동했다. 이런 인연으로 대구소년단이 울산을 거쳐 언양까지 방문하여 공연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1925년 전후로 언양 출신 정인섭과 신고송은 전국적인 지명을 가지고 본격적인 아동문학운동을 하였다. 그들은 암울한 시대현실에서도 계몽과 교육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고자 했다. 정인섭(1905~1983, 3회)은 1925년을 전후로 일본에서 색동회에 가입 후 잡지 <어린이>. <신소년> 등과 국내 신문에 기고하며 1929년 일본 유학 시절에 적극적으로 창작과 문화운동 활동을 하였다. 신고송(1907~?, 6ㆍ10회)은 일본 유학을 하러 간 1930년 이전까지 국내에서 활동하였다.
정인섭, 울산의 설화를 세계에 알리다
언양 서부리 136번지는 정인섭의 삶터인 동시에 신고송의 삶터이기도 하다. 같은 삶터의 사람은 그들의 가정형편부터 달랐고, 그것은 그 후의 삶의 모습 역시 다르게 나타났다. 정인섭은 서부리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언양읍 어음리에서 살았다.
정인섭(鄭寅燮, 1905~1983)은 동래정씨 충의공파 후손으로 조부 정기주(鄭基柱, 1843~1927)는 포목 행상으로 부를 축적하고 충의참봉을 지냈다.
부친 정택하(鄭宅夏, 1870~1938)는 관찰부 주사를 지낸 2백석 부호로 개화된 인물로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언양읍성 객사터로 옮길 때 신축학교 건물 3교실 1동을 기부하였다. 부인은 천주교인 수산나 오화수였다. 정인섭에 따르면 모친은 시집을 와서 딸 여섯을 낳았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아서 늘 사랑방 문구멍을 통해서 감시받았다. 사촌이 아들 넷을 두어 양자를 하나 데려오려고 하였지만, 모친은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 아들을 억지로 간직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후 아들 정인목과 정인섭을 얻었다. 정택하는 유교인이었지만 천주교인으로 세례명은 요셉이다. 그런데 언양 화장산 자락에 있는 정택하와 오화수의 묘에는 아들 두 명과 막내 정복순 이름만 있다. 작천정 '정택하 이름바위'에도 마찬가지이다.
정인섭의 형, 정인목(1902~1982)은 언양공보 2회생으로 부산상고 9회로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 1904~1948)와 동기이다. 정인섭, 정인목은 언양사립보통학교 시절에 훗날 민속학자가 된 양등마을 출신의 송석하를 알고 지냈다. 정인섭은 나중에 송석하와 함께 조선민속학회에서 같이 활동하였다.
정인섭은 영문학자, 한글학자, 문학평론가, 어린이문화 운동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한 인물로 필명이자 호가 화장산인(華藏山人)으로 언양을 사랑했던 인물이다. 화장산은 언양의 서쪽에 있는 100여 미터의 낮은 산이다. 정인섭이 관여한 단체가 곧 그의 활동상을 보여준다. 색동회(1924), 해외문학파(1927), 한글학회(1930), 극예술연구회(1931), 조선민속학회(1932), 조선음성학회(1935)가 그것이다.
1917년 언양공보를 3회로 졸업하였다. 정인섭은 대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1년 일본으로 가서 동경욱문관(郁文官)중학, 제일조도전(第一早稲田)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즉시 조도전(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진학하여 1929년 3월 졸업을 하였다. 일본에서의 저서로는 영문 <만국동화집(萬國童話集, 1925)>과 일문 <온돌야화(溫突野話, 1927)>가 있다.
정인섭은 1920년대 어린이 문화운동의 핵심 인물 중의 한 명으로 언양지역 활동은 대학 재학시절이었다. 1923년 4월 정인섭이 주장하여 언양에 여자 야학을 개설하였다. 지역 유지의 기부금이 다수 모집되어 언양공립보통학교 여자부 교실에 하기로 하였다. 1923년 6월 17일 정인섭은 동아일보에 <교육자의 호소>라는 칼럼을 발표하였다. 학교 교원의 인격을 무시하지 말고, 교원은 열성과 친애를 가지고 자신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1923년 3월 16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진장섭, 윤극영, 조재호, 고한승, 정순철, 정병기 등이 한국 최초의 어린이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했다. 손진태는 정인섭에게 색동회 가입을 권유했다. 당시 한국의 설화를 연구하던 손진태가 한국에 문예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한국의 얼을 찾아 소박한 전통을 담고 있는 신화‧전설‧동화‧우화 및 동요를 수집해야 한다는 것에 정인섭도 동의하고 있던 때였다.
1925년 동경 와세다대학 제2고등학원과 고등사범부에서 영어교과서로 사용하게 될 <세계동화집(萬國童話集)>을 대학교수 밴톡과 같이 저술하였다. 영어에 비상한 천재적 재능을 가진 그는 번역을 한국 근대문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핵심 기제이자 세계문학을 실현하는 통로하고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를 전후로 그는 색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어린이> 8월호에 정인섭의 <세계동화집(萬國童話集)>에 실린 영문동화 "북미동화-일희[이리]가 된 동생"이 번역되어 실렸다. 이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아동문학운동과 어린이운동에 관련을 맺는다. 이 일로 그는 1925년 11월 조선일보에 <다른 나라의 동화(Fairy Tales of Many Countries)> <호랑이 이야기(THE UNMANNERY TIGER)>와 <기묘한 검객(THE QUEER GLADIATOR)>을 영문으로 연재하였다. 또 본인의 창작 영문동화 <소년국(THE COUNTRY OF YOUTH)>을 1925년 12월 5일부터 20일까지 6회 연재했고, 1926년 1월 19일부터 22일까지 한국동화 <고양이와 쥐(THE CAT GUNDUPLE AND THE GOLDEN MOUSE)>를 4회 연재했다. 정인섭은 1926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시절에 동경 유학생인 김진섭・이하윤・김온・손우성 등과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하여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정인섭은 언양과 전국 각 지역의 옛이야기를 채록하여 1927년 3월 1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어판 조선 설화집 <온돌야화(温突夜話) : 한국민화집(韓国民話集)>을 니혼서원(日本書院)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은 한국 구비문학을 일본과 세계에 알린 최초의 설화집이었다. 조선의 온돌방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기어 자장가와 함께 들은 옛이야기로 종교적인 것은 제외하였다. 형제자매는 물론 친척, 친우, 기타 자신이 만난 사람들부터 채록한 것으로 그들의 성별, 유무식, 계급 등을 따지지 않고 채록한 것들이다. 이 책에는 조선의 신화·민담·전설·기담(奇談)·고대소설 총 43편이 실렸다.
정인섭은 <온돌야화> 서문에서 "사회의 어떤 부문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특히 내가 일본어로 발표하는 동기로, 조선을 보다 더 근본적으로 내적으로 깊은 곳까지 일본사람들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며, 특히 조선에 대해서 방관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은 일단 온돌야화로서 친숙해지기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한국문화 전반에 걸친 이웃 나라의 인식 부족을 개탄하면서 다소나마 올바르게 한국을 인식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일본어로 출판하는 것이라며 출판 동기와 목적을 밝혔다. 이 책은 외국인들의 한국 설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는데 이바지하였고, 한국인에 의해 일본에서 출판된 최초의 설화집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1952년 영국 런던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 신화 24편, 전설 39편, 민담 14편, 우화 19편, 고전소설 3편으로 총 99화를 수록하여 영문판 <한국의 설화(Folk Tales from Korea)>를 출판하였다. 정인섭의 <온돌야화>와 <한국의 설화>는 '한국의 아라비안나이트'라고 불리며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아르네와 톰슨의 설화색인표에 한국자료로는 유일하게 등재돼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한국의 설화>는 9편을 제외한 90편은 직접 채록한 것으로 채록자는 그가 밝힌 인물로 56명이다. 색동회원인 방정환(서울, 4편), 손진태(구포, 4편), 고한승(개성, 1편), 마해송(개성, 1편), 정순철(서울, 1편)이 있고, 민속학자 송석하(언양・온양, 3편), 시인 이상화(대구, 3편), 시인 이은상(마산, 2편), 해외문학연구회 이헌구(명천, 1편), 극예술연구회 윤백남(서울, 1편), 진단학회 최규동(서울, 3편), 시인 모윤숙(함흥, 1편), 교육자 박관수(울산, 1편) 등 13명이 26편을 채록되었다.
언양 사람은 17명이 채록자로 참가했다. 하지만 정인섭 본인의 이름은 없고 부친 정택하와 모친 오화수, 형 정인목, 여동생 정복순 등 대부분 가족이거나 인척들이었다. 울산 전체지역은 언양 29편, 온양 1편, 울산 1편으로 울산지역 이야기가 총 31편이 수록되어있다. 언양지역 이야기와 채옥자, 채록연대는 다음과 같다. 채록연대는 1911년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의 어머니 오화수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때 정인섭의 나이가 7살 때이다. 채록연대는 채록자로부터 정인섭이 설화를 들었던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야기 소재가 호랑이가 많은 것은 영남산무리가 호랑이의 서식지인 것과 연관이 있다.
<세계동화집(萬國童話集)>을 영어로 출판하고, 조선의 전설과 민담을 엮은 <온돌야화(溫突夜話)>를 일본어로 출판하려는 정인섭을 활동을 보고 방정환과 손진태가 색동회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였고, 정인섭은 1925년 색동회의 추가 회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어린이>에 아동극과 동요 등을 발표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어린이문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색동회에서는 '어린이는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봐야 한다'라는 이념을 실천하게 되었다.
정인섭의 동심주의 동시 운동
정인섭은 동시 23편, 동화 14편, 아동극 22편, 동수필 32편을 남겼다. 그의 창작활동은 <어린이> 잡지에 글을 쓰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어린이> 잡지는, 그때는 그야말로 샛별과 같이 빛나는 존재였고, 아동 잡지의 시초였으며, 일본정치 밑에서 일본말을 위주해서 교육받던 아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반가운 보배였고, 어른들에게도 한국의 얼을 찾게 하는 흐뭇한 위안지였다."
1923년 3월 20일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으며,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였다. 개벽사에서 펴내던 잡지 <어린이>는 실제로 이 단체의 기관지나 마찬가지였다. 어린이문화운동은 억압받고 폄하되어 왔던 어린이들의 정신적·육체적 자유를 부르짖었다. 오로지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세계와는 분리된 순수세계를 지닌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세계를 보호해주기 위해 근대아동문학이 형성되었다.
나라 잃은 시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도록 계몽과 교육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고자 했다. 당시 윤극영과 정순철은 동요를, 방정환 마해송 진장섭은 주로 동화를, 손진태는 역사 이야기, 조재호는 훈화를, 정인섭과 고한승은 주로 동화극을 취급하였다. 정인섭이 주안점을 두고 활동한 것은 동극이었다.
정인섭의 동시는 어린이의 순수한 동심을 표현하거나 어린이의 구체적 현실과 실제 생활을 노래한 생활 동시였다. 정인섭은 암울한 시대 현실에서도 계몽과 교육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고자 했다. 너무 감상적이고 눈물 짜는 노래가 아닌 밝은 노래였다.
아가씨 아가씨! 안녕하세요?/ 아가씨 지붕에 지을 짓고요/ 아침에도 적녁에도 짹 짹. (「참새」 부분)
가장 널리 알려진 동시가 「산들바람」이다.
산들바람이 산들 부운다/ 달 밝은 가을밤에/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바람 부운다/ 아 너도 가면/ 이 마음 어이해// 산들바람이 산들 부운다/ 달 밝은 가을밤에/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바람 부운다/ 아 꽃이 지면/ 이 마음 어이해- (「산들바람」 전문)
이 동시는 정인섭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고,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정인섭 묘지의 노래비에 새겨져 있는 작품이다. 이 동시는 현제명의 <현제명 작곡집>(1933)에 악보로 수록되어있다. 산들바람이 부는 달 밝은 가을밤을 역사적 현장으로 볼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 시에 대한 해석은 달라진다.
언양의 물방아를 노래한 시를 읽어보자.
깨끗한 언양물이/ 미나리밭을 지나서/ 물방아를 돌린다// 팽이 같이 도는 방아/ 몇 해나 돌았는고/ 세월도 흐르는데// 부딪히는 그 물살은/ 뛰면서 희게 웃네/ 하늘에 구름도 희게 웃네// 깨끗한 언양물이/ 미나리밭을 지나서/ 물방아를 돌린다// 사람 손에 시달리어/ 내 마음도 휘돌린다/ 인생도 팽이같이// 부딪히는 그 물살은/ 뛰면서 희게 웃네/ 하늘에 구름도 희게 웃네 - 「물방아」 전문
고향 언양 읍성의 미나리꽝을 지나 돌고 있는 물방아를 떠올리면서 적은 시이다. 팽이같이 도는 물방아는 몇 해나 돌았는가? 그런데도 물살이 희게 웃듯이 하늘 구름도 웃는다. 일제가 지배하는 힘든 시절이지만 희망을 품자는 것이다.
정인섭의 동시는 애상적이고 낙천적인 어린이들의 자연 친화적 정서와 그들의 해맑은 순수 동심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나라 잃은 시기의 현실에 대한 어린이들의 구체생활이나 미래지향적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1930년이 되면 일제의 식민지인에 대한 탄압의 강도는 심해지지 약해지지 않는다. 어린이는 순순한 동심을 유지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 순수함이 유지될 수 없었다. 정인섭의 동시는 구체적인 민족의 현실을 극복할 실천의지가 결여되어 있으며, 어린이의 인간존엄성이 박탈되어가는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이 숨어있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순수한 동심을 표현하고 있는 주관적 동심주의 시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