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시절 각계에서 쫓겨난 추방자들이 많았다. 직장을 잃고 거리를 헤매거나 칩거하면서 세월을 탄했다. 한승헌도 그중의 하나였다. 동병상련, 초록동색이 늘어났다.
법조계에서는 판ㆍ검사 같은 공직을 '재조', 민간인 신분인 변호사 사회를 '재야'라고 한다. 그렇다면 재야에서 추방된 나의 현 주소는 어디인가? '황야'다. 거친 들판, 외롭다.
그런데 여기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이 바람 부는 벌판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한 시대의 운명적인 동승자라는 느낌을 안고, 서로 마음과 체온을 나누는 무리를 이루어간다. (주석 5)
이런 추방자들이 이전전심으로 모여 만든 것이 '으악새 모임'이었다. 자칫 공안당국으로부터 '반국가단체'로 낙인될까 봐서였는지 토속적인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1974년 12월 9일, 김상현ㆍ조연하ㆍ조윤형 전 의원들이 안양교도소에서 출감해 김상현 환영을 겸한 송년 모임에 한승헌ㆍ장을병ㆍ리영희ㆍ이상두ㆍ윤현ㆍ김상현ㆍ윤형두가 모여 '으악새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나중에 김중배ㆍ한완상과 내가(임헌영-필자 주) 가입한 이 모임은 암담했던 유신통치 후반기에 마음 놓고 떠들고 노래하며 스트레스를 풀자는 취지라 모여서 맘껏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한승헌 변호사가 "오늘 우리는 '체'에서 벗어나기로 한다"로 시작하는 '으악새 선언'을 작성했는데 가히 명문이었습니다. (주석 6)
대부분 실직자들이어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리 없었다. 또 태생이 재야 아니면 황야 출신들이어서 싸구려 식당이나 선술집에서 만났다. 소주 몇 잔 들어가면 고복수의 <짝사랑>을 합창했다. 그래서 아예 모임 이름을 '으악새 모임'으로 정하였다. 뒷날 정보기관에서 그 이름의 함의와 배경을 캐느라 골치깨나 앓았다는 후일담이다.
으악새 선언
오늘 우리는 '체'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허울 좋은 도덕의 멍에 때문에, 처세와 체면 때문에 '나'를 속박해온 '체'를 벗어던지기로 한다. 자신을 학대해온 1년을 묻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산하기로 한다. 생각하면 얼마나 거짓생활에 이끌려 다녔던가. 우리의 고뇌와 피로를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 아니던가. 화려한 위장보다는 처참하더라도 진실의 목소리를 우리는 그리워한다. 남을 속이는 기만보다는 자신을 속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불가한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이에 우리는 겉으로 그럴듯하면서도 내심으로 외롭고 불행했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아가 그런 위로라도 삼고자 이 해를 잊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가슴을 마주 대하는 공동의 술상 앞에 나와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전원의 뜻으로 선포한다.
1. 오늘 이 자리에서는 누구나 솔직해야 한다. 솔직할까 말까 망설이는 자는 천추의 한을 면치 못할 것이다.
1. 오늘 이 자리는 저질을 우대하는 자리다. 인간의 태어남이 곧 저질의 부산물인고로 저질을 욕하는 자야말로, 태어남을 욕하는 자니라.
1.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한다. 어제와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잊어버리라. 내일 내일 하지만 언제 내일이라는 것이 한 번이라도 있어봤나. 기다렸던 내일이란 것도 당하고 보면 항상 오늘이었지 않은가.
1. 오늘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기를 맹세한다. 사람에게서 기분을 빼놓으면 주민등록증밖에 남을 것이 없다. 괜히 호마이카질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 발산에 일로매진 하기를 다짐한다.
1. 만일 위와 같은 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거나 그로 인해서 이 자리의 무드에 금이 갈 염려가 있을 때에는 사회자가 본의 아닌 긴급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 긴급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 아무런 벌도 받는 일이 없다. (주석 7)
주석
5> <자서전>, 211쪽.
6>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 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대담 유성호>, 403~404쪽, 한길사, 2021.
7> 앞의 책, 404~40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