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
예전에 친정 어머니는 지하철 역사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상행 에스컬레이터만 설치된 것을 보고 "올라가기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든데……"라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나는 '내려갈 때야 툭툭 내려가면 되는데 왜 힘들지?'라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중년이 되어 몸으로 경험하고서야 알게 됐다.
지난 주말, 가을 단풍을 놓치지 않으려고 가까운 매봉산에 갔다. 분명 씩씩하게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 다리에 힘주는 것이 힘들었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발목을 살짝 접질렸다.
산 중에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산, 가장 비싼 산은 부동산, 가장 중요한 산은 하산(下山)이라는 농담이 있다. 전문 산악인들도 산 중의 산은 '하산'이라며 등산보다는 하산할 때 조난 사고가 더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체력이 떨어진 데다가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다.
전문 산악인도 그럴진대 평범한 우리는 오죽할까. 하산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무릎에 가해지는 하중이 커지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무릎 관절을 둘러싼 근육이 발달해 무릎에 가하는 무게가 분산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근육량이 감소하면 무릎에 실리는 무게가 그만큼 증가한다.
문제는 이 근육을 평소에 단련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등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다리 근육은 대퇴사두근(quadriceps femoris muscle)이라고 하는 허벅지 앞쪽 근육이다. 하산할 때는 이 근육이 팽창하면서 만들어 내는 힘을 사용하는데, 운동으로 이 힘을 키우기 힘들다. 관절에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근력 강화 운동에도 등산과 비슷한 런지나 스텝퍼 동작은 있지만, 하산과 비슷한 동작의 운동 없다. 프로 운동선수들도 '산타기 훈련'을 할 때, 절대로 뛰어서 내려오지 않는다. '연습이 없는 인생이 하산과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인생을 산에 비유하곤 한다. 산에 오를 때는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려니 숨이 차고 힘들다. 내려갈 때는 중력에 순응하니 힘은 덜 들지만, 관절이나 연골에 무리가 간다.
인생도 젊을 때는 목표를 향해 심장이 벅차게 뛰어가느라 힘들다. 나이 들어서는 인생의 순리를 깨닫게 되니 마음은 덜 힘들지만, 몸은 노화를 겪으니까 말이다. 인생의 정점을 지나 50세에 들어선 지금은 '안전하게 하산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가 아닐까.
'한국등산학교'에서는 하산 시간을 등산 시간보다 2배 이상으로 길게 잡고 천천히 내려오기를 권하면서 무엇보다 경쟁하는 산행 습관을 버리라고 말한다. 산은 경쟁을 하거나 자기 과시를 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보다 먼저 가기보다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한 까닭이다.
얼마 전, 지인이 포천의 한 유원지에서 입장권과 모노레일 세트 표를 끊었다 한다. 왕복과 편도가 천 원밖에 차이가 없어 살짝 고민했지만, 숲길 산책도 할 겸 편도를 샀단다. 다른 사람들이 왕복표를 끊길래 혹시 중간에 볼거리가 별로 없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내려오며 깎아지른 절벽과 작은 폭포, 호수를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었다. 오솔길에는 도토리가 보이고 날아다니는 잠자리까지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렇게 예쁜 길을 천 원을 더 내면서 못 볼 뻔했다니!" 기분 좋은 하루였다는 말에 나까지 마음이 상쾌해졌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악인 엄홍길씨는 저서 <산도 인생도 내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에서 "산 정상에 올랐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정상에서 서서 '온 만큼 더 가야 한다'고 자만심을 경계한다고 한다. 정상에서 잘 내려와야지, 그렇지 못하면 성공의 가치를 다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잘 내려와야 다시 다른 봉우리에 오를 수 있다
그렇다. 산에서 내려오다 보면 또 다른 산등성이를 만나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인생이라는 큰 산에서 내려오지만, 50대 이후라는 새로운 산등성이를 오르는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희망과 목표를 가지고 새롭게 도전할 때도, 내 주위의 소소한 기쁨을 살피면서 자신의 삶을 돌보기를 바란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야 하산하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안전하게 그러나 즐겁게. 그럴 때 우리는 오십 이후를 향해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나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