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해서는 공간도 정체성도 바뀐다. 콧대 높은 쇼핑 공간의 전형인 백화점도 내부에 중고숍을 품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변하다'의 반대어가 '유지하다'가 아닌 '죽는다'가 된 시점에서 중고 시장이 커지는 소비 트렌드에 따라 백화점 3사 모두 중고 시장에 진심으로 대응하고 있는 모양새다.
현대백화점은 신촌점 유플렉스관 4층 전체를 중고품 전문관인 '세컨드 부티크(Second Boutique)'로 운영 중이다. 총 244평의 공간을 중고라는 테마에 할당해 세컨드 핸드(중고 물품) 의류 브랜드 '마켓인유'와 중고 명품 플랫폼 '미벤트', 럭셔리 빈티지 워치 편집숍 '서울워치' 등을 유치해 발 빠르게 공간에 트렌드를 담았다.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도 중고 물품 팝업을 운영하고 중고 플랫폼을 인수하거나 투자하는 등 중고 시장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한국만의 변화가 아니다. 프랑스 라파예트 백화점도 중고 패션 전문매장을 일찍이 운영하고 있으며 독일과 영국, 미국에서도 중고 매장을 운영하는 백화점들이 늘어나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전 세계 리커머스(re-commerce) 시장이 향후 2025년까지 연평균 15~20%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해 중고 시장을 품는 백화점의 합리성을 설명해준다.
중고 매장의 핵심은 '명품'
바야흐로 상품 과잉의 시대다. 생산기술 향상으로 하나의 물건이 갖는 가치(가격)는 이전에 비해 낮아졌다. 중고를 애써 사기보다는 온라인 가격 비교를 통해 저렴한 새 상품을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세상에서 중고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백화점에서 아무 중고 제품을 갖다 놓는다고 팔리지는 않을 것이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상품, 의미 있는 상품, 구하기 어렵거나 고가의 상품이 중고로서도 매력 있고 백화점 입장에서도 팔 만한 가치가 있다. 백화점 내 중고숍들을 봐도 유니크한 브랜드 또는 명품들을 거래하고, 현대백화점 '세컨드 부티크'의 매출을 봐도 3040의 주요 소비는 명품과 시계였다.
과연 가치소비, ESG 소비로 백화점의 중고 시장 진출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당근마켓 등 중고거래 플랫폼의 확산으로 사람들에게 중고 거래 자체가 보다 익숙해졌고, MZ세대의 환경을 생각하는 가치소비 트렌드도 중고품에 대한 수요를 키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화점 내 중고 매장에서 팔리는 상품들을 보면 그 방점이 중고 자체에 있지 않고 "명품"과 "브랜드"에 있는 듯하다.
주변을 보면 사회초년생 대다수가 명품을 갖고 있다. 학교에 가보면 10대 학생들까지도 명품 소비가 낯설지 않다. 이렇듯 '명품의 대중화'는 젊은 층에서 명품 구매가 크게 증가하며 가속화되고 있다. 10대, 20대가 선망하는 아이돌과 셀럽들은 유명 명품의 브랜드 앰배서더로 비슷한 나이대의 연예인들이 비싼 명품들을 다양하게 착용하는 모습이 쉽게 노출된다.
또한 명품을 과시하는 힙합 콘텐츠가 유행하면서 명품 브랜드들을 과거에 비해 쉽게 접하고 있다. 그래서 명품을 힙하다고 느끼며 선망하는 한편 좀 더 친숙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생긴 것. 따라서 명품 소비가 이전 세대보다 쉬워진 측면이 있다.
SNS의 생활화도 명품 구매를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상품이 곧 내가 되는 현대 소비 사회에서 명품은 내 정체성과 지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수단이다. 팬데믹 이전에는 해외여행 사진을 SNS에 올리며 경험 자체를 전시하기도 했지만 해외여행이 어려워지자 명품 소비를 하는 본인을 SNS에 전시함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알리고자 하는 욕구가 더 커졌다.
이렇듯 명품 대중화로 인해 명품 소비 경험은 늘었지만 경제는 안 좋아지고 고금리와 인플레이션으로 주머니 사정은 좋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중고 명품은 이들의 욕구를 합리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수단이 된다. 중고 명품 시장이 크게 성장하는 데 있어 MZ세대가 주역이라는 데이터들이 많이 나와 있다.
대내외 경제 불안 속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소비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은 신제품보다는 저렴한 중고 명품을 구매하고 기존 명품보다는 합리적인 가격의 소위 신명품(르메르, 메종마르지엘라, 메종키츠네, 아미 등)을 구매한다. 이렇게 젊은 층 중심의 중고 명품, 유니크한 브랜드 및 상품에 대한 수요 증가가 백화점의 중고 매장 유치에 큰 역할을 했다.
백화점이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다
<트렌드코리아 2023>에서는 불황기에도 불가항력적인 수요를 창출하는 전략을 뉴 디맨드(New Demand) 전략이라고 칭하며, 기업이 신규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가격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줄이는 방법을 소개한다.
"중고거래 역시 D2P(Disposal to Purchase,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기존 제품 폐기를 돕는)의 간접적이지만 유력한 방안이다. 중고시장을 활성화시키면 교체 수요 유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다. 백화점은 중고 매장을 운영함으로써 교체 수요를 유발한다. 기존 명품시장의 큰손인 4050은 백화점 중고 매장에서 손쉽게 본인이 소유한 명품을 판매하고 다시 명품 매장에 가 신제품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중고 명품을 판매하면서 경험했던 유쾌하지 않거나 번거로웠던 부분이 해소되면서 이 교체 수요가 더 활발히 일어난다. 또한 중고 명품 매장을 운영함으로써 2030이라는 명품 시장의 신규 고객들을 유입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어떨까. 백화점 내 중고 매장을 이용함으로써 환경을 생각하는 가치소비를 한다는 만족감과 중고거래 앱보다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중고품이기 때문에 더 신뢰가 간다는 심리적 만족을 얻을 수 있겠다. 또한 평소 선망했지만 경제적 여력이 없어 소비하지 못했던 브랜드와 모델을 중고로 사보는 경험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MZ세대는 소유보다는 경험이 중요한 세대로, 그 상품이 중고인 것보다는 내가 명품을 쓴다는 것 자체에서 의미를 느낀다. 이러한 소비 특성은 명품 보유 기간에도 영향을 준다. 좋은 물건을 오래 쓰기 위해 명품을 산다거나 명품을 사서 자녀에게 물려준다는 개념보다는 경험 소비의 개념이 강해지면서 실제로 명품을 사고 리셀하기까지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MZ세대가 명품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백화점 내 중고 매장, 사회적으론 어떠할까. 자원의 재활용이라는 친환경 측면에서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중고라는 이미지의 리브랜딩 효과는 확실히 있다고 느낀다.
중고 시장 또는 벼룩시장의 기존 이미지는 검소와 절약, 일견 소시민적 느낌으로 다가오기 쉽다. 그러나 백화점 내 중고 매장이 들어감으로써 중고 거래에 대한 가치소비 측면이 부각되며 좀 더 당당하게 중고품 소비를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백화점 내 중고 매장. 그것은 유통업체가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비하며 사는 시대에 어떤 것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궁리한 결과, 시대가 만들어낸 정체성의 변화다.
2023년, 최악의 경기가 예상되는 가운데 개인도 만족감을 온전히 포기하지 않고, 기업도 신규 수요를 포기하지 않으며 이처럼 끊임없이 살아갈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정(靜)체성이 아닌 동(動)체성이 필요한 생존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