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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겨울이면 연례행사가 있다. 바로 친정의 김장이다. 우리 엄마는 항상 김치를 한가득 담그신다. 그 규모가 거의 100포기에 가깝다. 김장이 다가올수록 엄마는 분주하다. 배추와 고춧가루 상태를 걱정하고, 김장 전까지 아프면 안 된다고 몸을 사린다.

사실 김장은 고되다. 김칫소를 만드는 것부터가 일이다. 무를 채 썰고, 마늘을 다지고, 고춧가루를 넣어 버무린다. 우리 집 김치엔 청각도 들어간다. 척척척 칼질하는 엄마와 달리, 나머지 가족의 칼질은 영 서투르다. 김칫소를 버무릴 때면 집안에 매운 향기가 넘실거린다.

김장하는 동안 김치가 익거나 퍼지면 안 된다고 온 집안의 창문을 열어젖힌다. 온 가족이 추위에 벌벌 떨며 김장을 한다. 절인 배추를 나르고, 만들어 놓은 김칫소를 바르고, 통에 차곡차곡 담는다. 한참 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남아있는 배추가 한 가득이다.

덕분에 김장 후에는 몸살 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족들은 '힘드니까 올해는 제발 많이 담그지 말자'라고 엄마를 말린다. 하지만 절대 '김장하지 말자'라고 말하진 않는다. 모두가 김장 김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모두 엄마표 김장김치를 사랑한다.
 
 수육과 함께하는 겉절이는 꿀맛이었다.
수육과 함께하는 겉절이는 꿀맛이었다. ⓒ 오지영
 
그 많은 김치를 나와 외할머니, 친정에서 일 년이면 다 해치운다. 항상 밥상에 김치가 올라온다. 김치는 정말 효자 반찬이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전, 김치찜 등 많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 가장 김치를 사랑하는 아빠는, 그냥 먹는 김치가 최고라고 하신다.

어릴 적, 김장 김치가 유독 맛있게 익었던 어느 해 겨울이 생각난다. 나는 방학 동안 동생과 함께 집 근처 작은 미술학원에 다녔다. 늦었다고 신발을 구겨 신으면서도 엄마를 향해 외쳤다.

"엄마! 오늘 점심도…."
"알았어.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 와."


미술학원에 간 동생과 나는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누구보다 재빠르게 학원을 나섰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헤치며, 소복이 쌓인 눈을 씩씩하게 밟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집 현관문을 여니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나와 동생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식탁 위에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가 놓여 있었다. 뚝배기의 열기로 여전히 바글바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는 소리로, 냄새로 우리를 사로잡았다. 물론 맛은 더 기가 막혔다. 엄마 말로는 우리 자매가 한 달 내내 그 김치찌개만 점심으로 먹었다고 했다. 그 해 김장 김치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결혼한 후에도 몇 번 김장을 도우러 갔다. 그러나 아이들이 태어나고, 사는 지역이 친정과 멀어지면서 나는 김장 동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몸은 편한데, 마음은 불편했다. 가족들 모두가 고생하는데 날름 김치만 얻어먹는 기분이었다.

올해 김장철에도 전화를 드렸다. 이번 김장엔 가겠다고 입을 열었더니, 엄마가 절대 오지 말란다. 아이들도 춥고, 집도 정신없다고. 당일 저녁이나 다음 날 아침에 김치만 받으러 오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다시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 김장 날 좀 더 일찍 올 수 있냐는 전화였다. 일손이 부족한가 싶어서 냉큼 알겠다고, 몇 시까지 가면 되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그게 아니란다.

"김장 도와 달라는 건 아니고. 그날 겉절이에 보쌈 먹을 건데 어때? 막걸리도 사다 놨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 싹 고였다. 알겠다고, 무조건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올해 김장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느린 손으로 유명했던 여동생이 날이 갈수록 손이 빨라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었다. 그날의 메뉴는 엄마가 예고한 대로였다. 김치와 함께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수육이 식탁 위에 등장했다.

겉절이는 아직 양념이 다 배지 않아서 다소 삼삼했다. 하지만 시원했다. 김치를 길게 찢어서 따끈따끈한 고기 위로 둘둘 말아 입 안에 넣었다. 온 가족이 맛있다고 난리였다. 엄마는 겉절이를 먹으며 올해 김장 김치 맛이 어떨지 가늠해보셨다. 엄마 말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단다.
 
 묵은지와 돼지고기를 넣어 바글바글 끓인 김치찌개는 진정한 밥도둑이다.
묵은지와 돼지고기를 넣어 바글바글 끓인 김치찌개는 진정한 밥도둑이다. ⓒ 오지영
 
엄마가 김치 몇 통을 꺼내왔다. 한 통은 겉절이니까 미리 먹고 나머지는 나중에 먹으면 된다고 했다. 베란다를 보니 여러 개의 김치 통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와, 진짜 많이 담갔네' 하고 감탄하고 있으니 엄마가 피식 웃으셨다.

"그래도 저거 금방 없어질 걸? 저 정도는 해야 든든하지."

집에 돌아와 엄마가 준 김장 김치를 김치냉장고에 넣었다. 옆에는 아직 남아 있는 묵은지가 자리했다. 김치로 가득 찬 냉장고에 비례하여 내 마음도 든든해졌다. 내일은 묵은지로 김치찌개를 끓이고, 반찬으로 겉절이를 먹으면 되겠네.

사실 어릴 땐 밥상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김치가 불만이기도 했다. 김치보다 맛있는 음식이 더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엄마표 김치만큼 맛있고 소중한 음식이 없다. 맛있는 김치만 있으면 라면 한 그릇, 밥 한 공기도 훌륭한 밥상이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춧값이 치솟아서 김장을 못 하겠다는 분들이 많았는데, 다행히 가격이 다소 내려갔다. 여기저기서 김장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부디 모두의 김장김치가 맛있게 익기를. 나 또한 어릴 적 김치찌개의 맛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점심시간#김장#김치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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