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개추위의 책임을 맡은 한승헌은 나라에 대한 마지막 헌신의 기회라 여기면서 규정상으로는 비상근인데도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일하였다. 국민과 언론의 관심도 많아서 이번 기회에 사법의 낡은 고질을 끊어내고 새 시대에 걸맞는 사법체계를 만들고자 하였다. 로스쿨법안 등 현안도 많았다. 하지만 반개혁의 벽은 너무 두텁고 층위는 높았다. 일제강점기 이래 누려온 기득권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위원회가 의결한 25개의 개정(또는 제정) 대상 법률안은 국무회의를 거쳐 2005년 5월부터 2006년 7월 사이에 정부안으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그런데 법안이 국회로 넘어간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여야 간의 어수선한 정쟁에 휘둘려 사법개혁법안의 심의가 외면당하거나 지지부진했다. 사개추위의 활동 시한인 2006년 연말이 다가오는데도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은 8개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상임위원회에 걸려 있거나 아예 상정도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법개혁의 핵심 법안은 눈 흘김의 대상이 된 채 소박을 맞고 있었다. 한나라당은 이를 사립학교법 개정과 연계시키며 '태업'을 계속했고, 사개추위안을 뒤집으려는 '공작'도 난무했는가 하면, 직함이나 지역 사정에 얽매이는 의원들의 고충도 여기에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권에 대한 야당의 본능적 거부감도 '개혁 저지'의 심리적 요인으로 꼽혔다. (주석 3)
한승헌은 성격상 내키지 않았으나 국회를 찾았다. 의장단과 로스쿨 법안을 다루는 교육위원회 위원장 등 관계자들을 만나 개정법률안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설명했다.
면전에서는 호의적이었지만 돌아서면 딴 얼굴의 선량이 너무 많았다. 지난날 그가 여의도행 티켓을 한사코 마다했던, 그 행태를 새삼 지켜보는 듯 했다.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7년 4월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7월 3일에는 로스쿨 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로스쿨 법은 인가학교 수와 입학 정원문제로 논란이 많았지만, 법 시행과정에서 큰 변고 없이 진척되어 2009년 3월에 문을 열었다. 물론 문제점이 남아 있으나, 로스쿨 제도가 현행 사법시험제도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법조인 양성기관으로 발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국민참여재판도 아직은 생소하지만 '국민에 의한 사법'으로 발돋움하는 민주적 사법시스템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다.
역사적인 사법개혁에 일조를 한 것은 나로서는 매우 큰 보람이었다. (주석 4)
한승헌은 2001년 3월 15일 사법연수원 특강에서 예비법조인들에게 <이땅의 법조인이 가야할 길>을 강조했다. 젊은 시절 한 선배로부터 "변호사는 면기난부(面飢難富)라는 말을 들었다. 굶지는 않을 터이니 부자될 생각은 하지말라."는 말을 소개하면서 덧붙였다.
8.15해방 후 이 나라의 법조계는 인적 구성 면에서는 일제 치하의 연장이었다. 일제의 관리로서 우리 애국자를 포함한 동족을 기소하고 재판하던 판ㆍ검사들이 해방된 내 나라의 법정 안팎에서 여전히 요직을 차지하고 행사했다.
다시 말해서 퇴출과 심판의 대상들이 오히려 심판관석에 군림했다. 해방 당시의 법원, 검찰의 일반직들이 약식시험을 거쳐 판ㆍ검사가 되었으나 그것은 그들 개인에게 있어서는 행운의 신분상승이었을지는 몰라도 해방 조국의 민주주의 건설과 인권창달에 이바지하겠다는 열의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처럼 우리 법조는 민족정기 면에서 볼 때 정통성이 결여된 채 민망한 역사를 열어나갔다. (주석 5)
주석
3> <자서전>, 363~364쪽.
4> 앞의 책, 365쪽.
5> <역사의 길목에서>, 31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