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1884년 11월 30일부터 이틀 밤을 부산의 초량 왜관에서 지냈는데, 썩 유쾌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인들의 눈은 나를 끊임없이 정탐하였고 묄렌도르프에 의해 고용된 서양인 세괸직원들은 나를 가십거리로 삼았지요.
정나미가 떨어진 나머지 윌리엄 로버트 세관장 부인이 나를 방문하겠다는 제의도 거절했습니다. 왜관의 서양인들은 거의 모두 일본 여자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서양제 수입품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일본제 일색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곳은 조선 땅 속의 일본, 그것이었습니다. 씁쓸한 풍경이었지요.
12월 2일 추운 아침에 왜관을 나와 동래로 향했습니다. 11시 3분에 도착한 동래에는 약 7천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동래 방문에 대해 사전에 통보를 받은 부사가 우리를 친절히 맞이하더군요. 그는 아주 쾌활한 사람으로 외국인을 매우 편하게 응대했습니다.
그는 내게 얼마간 노자돈을 주었고 또한 선물로 비단과 과자를 주었습니다. 오찬을 대접받았는데 상차림이 한식도 양식도 아닌 일본식인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인들의 행동거지며 관아의 분위기 등 모든 것에서 외국 영향이 물씬 풍겼습니다.
동래나 부산은 전반적으로 예전에 비하면 분명 활기가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의 실생활은 나아진 기미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더군요. 노상의 좌판에는 음식을 파는 여자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습니다.
나는 동래에 작별을 고하고 양산, 밀양, 대구, 칠곡, 해평, 도개를 거쳐 12월 8일 상주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구릉이 조랑말이 달리듯 연이었고 곳곳에 계곡이 나 있었는데 우리는 정오쯤에 어느 깊은 계곡에서 추위를 피히고 있었습니다. 그때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서울에서 민태호와 조영하가 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살해 당한 조영하의 동생이 당시 대구 감영의 수장(관찰사)으로 있었는데 조영하의 피살 사실을 전하기 위해 서울에서 전령이 대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전령으로부터 우리의 가마꾼이 정보를 얻어들었던 것입니다.
권세 높은 조정 대신들이 살해당했다면 분명 일대 변고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 비상 사태가 일어날 조짐에 대해 푸트 공사에게 자세히 정세보고를 한 바 있었습니다. 불길한 나의 예감이 현실이 되고 만 것입니다.
가마꾼의 이야기로는 모두 예닐곱명이 살해되었다고 했습니다. 민영익 이름도 나왔는데 생사가 불분명했습니다. 나는 휘몰아치는 격랑을 직감하였고 온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그때 나는 함창이라는 마을에 있었습니다.
조선의 내지에 고립된 외국인으로서 나는 과연 안전할 수 있을까? 불안감이 엄습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문경 새재까지는 35리, 상주골까지는 45리가 떨어져 있었지요. 과연 어느길로 상경하는 것이 안전할까? 고민한 끝에 문경 새재를 지나 충주 쪽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는 구릉과 협곡, 마을과 강을 지났습니다. 어느 산골을 지날 때 악귀를 내쫒는 굿판(exorcizing)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마당에 장대를 세워 놓았는데 장대에는 기다란 종이 깃발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면서 춤을 추더군요. 괴괴한 분위기였습니다. 얼마전에 밀양에서도 그런 굿을 보았지요.
이내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내렸습니다. 가마꾼들은 현지 주민들을 닥달하여 횃불을 들게 하였습니다. 횃불을 앞세우고 우리는 주막에 들었습니다. 6시 15분이었지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리는 눈발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증으로 애를 끓였습니다. 앞으로 내 신상에 무슨 일이 닥치게 될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지금 나는 몹시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 서울에서 380리 떨어진 조선 땅 깊숙히 나는 홀로 놓여 있다. 눈은 내리고 나는 산 마루를 넘어 가야 한다. 노자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외국인을 혐오하는 양반들이 나의 길을 기로 막고 있다. 조선인들이 혐오하는 왜인보다 나는 그들에게 더욱 낯선 존재이다. 나는 홀로인데 이 땅은 무정부 상태가 될 조짐이다. 이곳에서 문경 새재까지는 30리, 충주까지는 110리, 서울까지는 380리이다." - 1884년 12월 8일자 일기에서
'왜놈들'이 조선의 대신들을 살해했다는 소문으로 민심은 들끓었고 일본인과 외국인에 대한 증오가 치솟았습니다. 내가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한편, 나의 여행에서 뒷배가 되어준 민영익이 제거되었다면 조선 관리들은 이제 나를 외면해 버릴 것입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나를 가까이 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위험한 일일 것입니다. 나는 여러모로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12월 9일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험준한 문경 새재를 넘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두려웠습니다. 길 위에서 들은 정보로는 서울에서 민영익을 비롯하여 17명의 고관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했습니다. '왜놈들'도 그만큼 죽었다고 했습니다. 나의 수행원과 가마꾼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더군요. 그날 밤 산골 주막에서 뜬 눈으로 지새며 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민참판(민영익)의 머리가 반쯤 날라가 그 다음 날 죽었다고 했다. 그를 보호하던 몇 명의 병사들도 살해됐다고 한다. 성 안 사람들은 탈출하기 위해 성벽을 허물었고 왕이 피난한다는 소문이 나돈다고 한다. 필시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우리 공사관 동료들이 몹시 걱정되었다. ... 오늘 밤 마음이 무척 무겁다. 나의 조선인 동행들도 모두 서울에 있는 처자식에 대한 걱정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여, 우리를 고난에서 구하소서. "- 1884년 12월 9일자 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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