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씨 1,300도 이상의 뜨거운 불로 구워 냈어도 막 내린 첫눈처럼 새하얀 살결. 온화한 백색과 유려한 곡선. 꾸밈없이 넉넉하고 포근한 몸매. 마치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두둥실 떠 있는 듯하다.
같은 하얀색이라도 색감에서 풍기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눈처럼 희디 힌 '설백색(雪白色)'이 있는가 하면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청백색'이 있다. 우윳빛깔이 나는 '유백색'도 있고 엷은 회색이 곁들여진 '회백색'도 있다.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정서가 가득한 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현재 까지도 다채롭게 계승 발전되고 되고 있는 조선백자 달항아리 이야기다. 달항아리는 밝고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백자대호(白磁大壺)' 또는 둥근 항아리라는 뜻으로 '원호(圓壺)'라고 불렀다. 2011년부터 문화재청에서는 '달항아리(Moon Jar)'라는 공식 명칭으로 바꿨다. 달항아리는 여느 도자기들과 다르게 높이가 40cm가 넘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위아래를 따로 만들어 이어 붙였다.
이런 까닭에 약간 찌그러진 듯 완벽하게 둥글지도 않고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제각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무 무늬도 없이 텅 비어 있는 흰 여백은 보는 이들에게 편안함과 함께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이 어리숙하면서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
미술사학자이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고(故)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선생의 달항아리 예찬이다. 최순우 선생은 평생을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탐구했던 인물이다. 그가 남긴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최순우 선생뿐만 아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 화백도 "나는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라고 극찬했다.
김환기 화백은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얻어 <항아리와 여인들>, <항아리와 매화>, <나무와 달>, <달과 항아리>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화폭에 남겼다. '달항아리'라는 이름의 유래가 백자 예찬론자였던 최순우 선생과 김환기 화백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이야기는 꽤나 설득력이 있다.
조선 후기 잠시 유행하다 사라진 달을 품은 항아리
인류가 수렵과 채집의 시대를 거쳐 경작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등장한 '그릇'은 인류 문명의 기원이 되는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 지금으로부터 약 8,000여 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서는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어 썼다. 이때의 토기는 손으로 그릇을 빚고 빗이나 각종 도구를 이용하여 표면에 여러 형태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빗살무늬 토기'였다.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무늬는 없어지고 안정감이 있는 '민무늬 토기'가 나타난다. 민무늬토기는 철기시대 때 다양한 형태의 '두드림무늬토기'로 발전한다. 삼국시대의 토기는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지면서 더욱 단단해진다. 통일신라 때는 토기 표면에 유약을 입힌 연유(鉛釉) 토기와 녹유(綠釉) 토기가 나온다. 유약을 입힌 토기가 어느 정도 정착되면서 '토기(土器)'에서 '자기(磁器)'로 이행되는 과정이 나타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그동안 축적된 기술과 중국의 청자 제조 기술이 유입되면서 아름다운 비색의 고려청자가 꽃을 피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시대 때 회색의 분청자기와 흰색의 백자가 널리 보급된다. 분청자기는 고려청자가 조선의 백자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나타난 그릇으로 조선 중기에 사라진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시대가 바뀌면서 도자기의 색깔도 바뀌게 된다. 고려말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고려의 하이테크 산업이었던 청자 산업도 쇠퇴하게 된다.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고려 왕실이 주도하였던 청자의 생산은 사치로 여겨졌다.
청자를 굽던 장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사기장들은 국가의 간섭 없이 각자 자유롭게 새로운 형태의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고려와 조선 사이 시대를 넘고 색을 넘어 새로운 도자기 '분청자기'가 탄생한다.
검소함과 겸양과 절제를 미덕으로 한 성리학적 사고를 시대의 이념으로 삼아 새로운 유교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조선의 지배층들은 분청자기를 더욱 발전시켜 완전히 하얀 색깔의 조선 백자를 탄생시킨다. 조선의 백자는 국가 주도로 철저한 관리 감독하에 생산하였고 왕실 이외에서 사사로이 사용하거나 제작하는 것을 금했다.
17세기로 넘어오면서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푸른 그림이 그려진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여백이 많아지고 무늬가 간결해진다. 순백의 백자는 화려함보다는 검소함과 결백을 추구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이상향이 담겨 있는 그릇이다.
17세기 후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을 겪으며 국력이 쇠퇴한다. 전쟁 중에 백자를 굽던 가마는 파괴되고 도공들은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조선의 백자 산업은 급속도로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전쟁이 끝난 후 왕실에서는 부족한 백자를 조달하기 위해 비교적 제작이 쉬운 달항아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능숙한 기술을 지닌 사기장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기능만 있으면 항아리를 만들 수 있었기에 경기도 광주에 있는 관요를 중심으로 생산하게 된다. 이후 약 100여 년간 유행하던 달항아리는 18세기 후반 무늬가 화려한 대체 자기들이 보급되면서 점차 사라진다.
국보로 남은 명품 달항아리
한국인의 심성과 정서, 미적 감각을 가장 잘 대변하는 문화유산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첫 번째로 꼽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 등장했다가 갑자기 사라진 달항아리는 300여 년을 지나 오늘로 이어지며 여러 형태로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다. 화가의 붓에서 사진작가의 렌즈를 통해서 도예가들의 손끝에서 시대적 해석을 더해가며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뮤즈'가 되고 있다.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에 잠시 유행하다 사라진 달항아리는 백자 중에서도 무늬가 없는 순백자 항아리로 높이와 너비가 40cm가 넘는 큰 항아리다. 당시 왕실의 식사와 식기류를 담당하던 관청이었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이 있었던 경기도 광주 금사리에 있던 왕실 전용 가마에서 만들어졌다.
현재 국내외에 남아있는 달항아리는 약 20여 점으로 추정한다. 고려청자나 분청사기 등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남아있는 수량이 적어 희소가치가 매우 높다. 최근 세계적 미술품 경매 회사 크리스티에서는 오는 3월 일본인이 소장했던 달항아리 한 점을 100만 달러(한화 14억 원)에 출품한다고 밝혔다.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일본의 오사카 시립미술관에도 18세기에 만들어진 우리 달항아리가 전시되어 있다. 이렇듯 세계적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달항아리는 7점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됐다. 3점이 국보로 지정됐고 4점은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그중 국보 제262호는 우학문화재단 소유로 경기도 용인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3점의 국보 중 가장 크다. 높이 49cm, 입지름 20.1㎝, 밑지름 15.7㎝로 눈처럼 하얀 설백색을 띠고 있다. 바닥에 닿는 굽이 입지름 보다 작아 마치 둥근달이 두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대표할 만한 수작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에도 명품 달항아리 1점이 있다. 2007년 국보 309호로 지정된 이 달항아리는 높이 44.2cm, 지름 42.4cm로 몸통의 곡선이 둥글고 풍만하며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바깥 표면에 군데군데 생긴 얼룩은 기름이나 간장을 담았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건희 회장이 아파트 여러 채 값을 주고 구입할 정도로 애장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서울 종로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좌우대칭이 맞지 않고 약간 비뚤어진 변형된 형태의 달항아리가 한 점 있다. 국보 310호로 지정된 작품으로 개인이 소장하던 것을 고궁박물관에서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다.
높이 43.8cm, 몸통 지름 44cm 정도로 큰 탓에 한 번에 물레로 올리지 못하고 상하 부분을 따로 만든 후 두 부분을 접합하여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간 찌그러졌지만 최순우 선생의 말처럼 '이 어리숙하면서 순진한 아름다움'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정을 느끼게 한다.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여전히 위정자들은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 깊이 갈라져 반목과 갈등으로 서로 맞서고 있다. 국민들마저 절반으로 나뉘어 혼란이 가중되는 어지러운 세상이다. 이런 때일수록 위아래가 서로 이어져 소통하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달항아리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대한민국 국회의장실에 두 개의 달항아리가 떡하니 앉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 134호(2023년 1월, 2월)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