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언련 언론포커스'는 언론계 이슈에 대한 현실진단과 언론 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해보는 글입니다. 언론 관련 이슈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고 토론할 목적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기명 칼럼으로,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기자말] |
JTBC는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대박 터트릴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드라마 몰아보기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의 시청 형태를 고려한 금‧토‧일요일 주 3회 편성이 잘 맞아서일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재벌 걱정, 연예인 걱정, 건물주 걱정이라고 하던데, 쓸데없이 방송사 걱정까지 더한 꼴인가 싶긴 하다.
제도 대신 돈이 계급을 만든다
<재벌집 막내아들> 주인공 윤현우(송중기 분)는 순양그룹의 오너리스크를 관리해 온 '머슴' 중 한 명이다. 오너가의 지시에는 그 어떤 질문을 하지 않고, 거절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따른다. 직원 휴게실에서 컵라면을 먹을까 싶다가도 오너가의 부름이 있으면 그 일이 설령 화장실 비데를 설치하는 일이라 해도 하라면 한다.
순양그룹 진양철 회장은 스스로를 장사꾼이라고 말한다. 정미소 쌀을 나르기 위해 사들인 용달차 두 대가 전부였던 운수회사를 발판으로 재계 서열 1위를 다투는 재벌그룹을 만들어냈다. "돈을 잃었으면 유죄, 돈을 벌었으면 무죄"가 그가 말하는 '정도경영'의 논리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정치권에 돈을 대고, 언론계와 사돈을 맺고, 법조계를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한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농성을 보고, '사람 장사' 말고 '기술 장사'를 해야 먹고 산다며 반도체 사업이 순양의 미래라고 말한다.
진양철 회장은 아들 셋과 딸이 하나 있다. 이들은 진양철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민'으로 살 일이 없는 '주인' 계급으로 산다. 그들은 윤현우와 같은 '머슴'을 곁에 두는데, 주인에게 충성하는 머슴을 요구할 뿐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혹은 손해를 피하기 위해선 배신도 쉽다. 이럴 때 들먹이는 게 계급 차이다. 억울하면 진양철 회장의 아들로, 딸로, 손자로 태어나지 그랬냐고. 그들은 그들만의 논리를 편다.
재벌집 자식을 꿈꾸게 하는 판타지 드라마가 보여준 것
드라마 기획 의도가 인상적이다. "양극화가 날로 극심해지고, 출신 성분이 곧 계급이 되는 사회, 부모가 가장 큰 스펙이요, 재능인 세상. 태어나는 그 순간,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 방에 결정 난다면... 고단한 인생, 살아갈 의미가 있을까? 감히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흰색 와이셔츠에 아메리카노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회사원의 모습에서 스무 살 청년 윤현우의 때 묻은 겉옷은 대조될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1987년. 순양그룹 진양철 회장의 초등학생 막냇손자 진도준으로 회귀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이런 설정이 시작되고 드라마가 큰 환영을 받은 것은 비슷한 상상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시간을 돌려서 "내가 재벌집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하는 상상 같은 건데, 우리 사회에 물질적 결핍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주식과 부동산, 코인 투자처럼 경제적인 성공이 간절한데 만약 내가 재벌가 손자로 태어난다면 얼마나 달랐을까 싶다는 얘기다.
미래에서 온 내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대단한 능력까지 지녔다면 상상만 해도 벅차다. KAL 858 사건, IMF, 주식 열풍과 닷컴버블, 상암DMC 개발, 9.11테러까지. 심지어 서태지의 은퇴와 복귀, 2002 월드컵 4강 진출, 장미란 역도선수의 올림픽 은메달도 안다. 손가락 하나로 분당 땅 5만 평을 달라고 할 수 있는 9살 꼬마가 될 수 있다면?
오너가에 충성한 자신을 죽이려던 자를 찾아야겠다는 복수가 중심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막대한 재산을 불려가는 백발백중 성공 투자 이야기였다.
현실에서도 대기업 규제완화, 친기업 여론조성, 재벌 경영승계
윤석열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불법과 타협 없다"는 강경 입장을 세웠다. 1차로 시멘트, 2차로 철강, 석유화학 분야 화물운송 기사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했다. 정부가 재벌 대기업 화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화물 노동자들의 파업을 탄압한다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언론은 '안전운임제를 논의하자'는 조합원들의 요구보다 '물류대란', '주유소 휘발유 품절'을 키워 공포심 조장에 나선 모습을 보였다(민주언론시민연합 신문방송 모니터보고서,
<안전운임제 외면한 언론, 화물연대 파업 비난할 자격 있나> 12월 2일).
언론은 파업의 본질보다 기업과 업계 피해를 위주로 부각했다. 화물연대 총파업이 한 달 전에 결정됐고 10일 전 예고된 것이었다는 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원만한 협상의 여지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운임제 논의를 따져 묻기보다 노조의 폭력적인 모습을 부각한 보도가 눈에 더 띄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재벌그룹의 경영권 승계가 속도를 내고 있다고 한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는 "재벌 규제완화라는 확실한 시그널을 주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경영세습에 문제가 될만한 규제가 줄고, 여론이 친기업적인 상황으로 조성되고 있다고 할 만한 여러 조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복수를 이뤘다. 복수는 억울한 사람이 아니라 힘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끝났다.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우니까 판타지 드라마라고 에둘러 말했겠다 싶다. 하지만 그런 힘을 희망처럼 안고 살아갈 만한 세상이기를 바라는 건 판타지가 아니기를 생각하게 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수정(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입니다. 이 글은 민주언론시민연합 홈페이지(www.ccdm.or.kr), 미디어오늘, 슬로우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