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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한 아이였다. 늘 부모님 말씀에 순종했고 사춘기도 쥐 죽은 듯 조용하게 넘겼다. 엄격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다 보니 속으로 억눌린 욕구들이 많았지만 겉으로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그것들은 차곡차곡 쌓여 곪기 시작했고 결국 성인이 된 후 터지고야 말았다. 한바탕 마음의 소용돌이를 겪고 난 후 이제는 과거를 훌훌 털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원망이라는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는 게 아니어서 아직도 가끔 고개를 들 때가 있다.

그래서였을까. 작년 8월,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동구에게 푹 빠져버렸다. 속 깊고 가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아이, 동구. 그 아이에게서 내 유년의 모습을 본 걸까. 순수한 소년의 눈에 비친 1980년대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가 가슴 찡하게 다가왔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착한 동구가 가슴 아팠다. 심윤경 작가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낸 동구 가족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러다 최근 밀리의 서재에서 심윤경 작가의 장편소설 <설이>를 보고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반가움을 느꼈다. 최근에 코로나를 앓고 난 후 후유증 때문에 집중력이 많이 떨어져서 책을 읽기가 힘든데, 이 작품은 손에서 놓지 못하고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심윤경 장편소설 <설이>
심윤경 장편소설 <설이> ⓒ 한겨레출판사

이 책은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후로 작가가 17년 만에 발표하는 두 번째 성장소설이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새해 첫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갓난아이 설이가 주인공이다. 13세 설이는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아이가 아니다. 세 번의 입양과 파양을 거치면서 마음 속에 분노가 화산처럼 들끓고 있다.

누구든지 자기를 무시하면 살쾡이처럼 달려든다. 설이의 보호자인 보육원 원장과 위탁 이모는 똑똑한 설이의 미래를 위해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최고의 사립 초등학교인 우상 초등학교에 전학시킨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설이의 눈에 부유층 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과 자식 사랑은 동경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자신과는 동떨어진 곳이라 여기던 그 세계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밖에서 상상하던 것과 달리 안에서 겪는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는데...

설이는 위선적인 어른들을 송곳처럼 날카로운 말로 찔러댄다. 읽으면서 일견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어른이라 하더라도 성인군자가 아니니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하거나 위선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데 너무 매섭게 몰아치는 설이라는 캐릭터에 정이 가질 않았다.

13세 소녀가 성장해가는 과정의 진통임을 알면서도 불편했던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인 걸까. 다행히 이런 감정은 뒷부분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해소되었다.
 
17년 만에 다시 내놓는 나의 두 번째 성장소설에서, 나는 사납고 버릇없는 아이들을 옹호하고자 했다. 거칠게 폭발하는 아이들, 앙칼지게 대드는 아이들에게 대놓고 잘한다 잘한다 해주고 싶었다. (중략) 어른들은 사나운 아이들의 용기와 에너지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침묵하는 착한 아이들이 억누르고 있는 감정과 욕망들을 밝고 안전한 곳으로 꺼내주어야 한다. - 337p
아이들이 침묵하는 세상은 옳지 않다. 아이들이 되바라지게 자기 주장을 내뱉을 때,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아주는 진짜 어른들이 많아져서 세상이 좀 더 시끌시끌한 곳이 되면 좋겠다. (중략) 세상의 아이들은 모두 소중하고, 우리는 모두 한때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 338-339p

설이는 버려진 아이라는 자기 비하와 분노, 원망으로 똘똘 뭉쳐있었지만 다양한 사건을 겪으면서 변화하고 성장해간다. 그리고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한 자신의 곁에 오랜 세월 변함없는 사랑으로 함께해 준 이모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모는 설날 새벽에 버려진 아기를 사랑했다. 그 아기가 바로 나였다. 그것이 기적 같은 일이었다는 걸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모가 나를 사랑하는 건 너무 당연해서 감사하기는커녕 값없고 하찮게 느껴졌고, 다른 아이들이 가진 젊고 세련된 '진짜' 부모들이 부러워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버이날 감사편지는 항상 원장님께 썼다. 이모의 몫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모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복잡한 조건법 시제 따윈 없이 나는 그렇게 사랑받았다. 별다른 감사조차 없이 당연하게 받아먹었던 그 소박하고 따스한 사랑이 기적인 걸 이제 알았다. - 331p

이 책에는 자녀의 미래를 위해 각종 코칭을 일삼는 부모들이 등장한다. 그 모습을 보며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로 포장하며 자신들의 욕망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 자식이 있었다면 나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작가는 설이의 입을 통해 성공을 담보로 한 이기적인 사랑의 민낯을 드러내며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서로 돕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혼자서 살아가기엔 너무 외로운 세상 아닌가. 설이에게 이모가 있듯 누구나 단 한 명이라도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 진심 어린 지지와 응원은 세상에 두 발 딛고 서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설이 역시 이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지지로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하게 된다.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조건을 내거는 경우가 많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좋은 대학에 가면, 안정된 직장을 얻으면, 내 마음(입장)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등등. 나 역시 과거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이제는 소중한 사람들을 대할 때 조건을 달지 않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원망과 서운함으로 소란스럽던 마음이 상대의 편에 서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잠잠해진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 보통 그 주인공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난 설이가 아닌 이모에게 푹 빠져버렸다. 설이의 말과 행동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엔 아직 내 그릇이 작은가 보다. 이런 부족한 내가 설이를 향한 이모의 그 초라하지만 한없는 따스함에 더불어 치유받았다. 결국은 사랑이 답이다. 책장을 덮었지만 긴 여운이 남는다. 오늘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설이#심윤경장편소설#책리뷰#꼭읽어야할책#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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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와 책 리뷰를 적는 브런치 작가입니다. 다정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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