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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간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왔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먹다가도, 짬뽕과 꿔바로우를 먹다가도 눈물이 터져 나와 같이 간 남편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운전하다가도 앞이 뿌예지기 일쑤였다.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눈물이 흘렀다.

친구와 통화하다가도 울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전해질까 봐 입으로 손을 틀어막아야 했다.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처럼 엎드려서 눈물을 참으려 해도, <눈물이 주룩주룩>의 카오루와 요타로처럼 코를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이 모든 사단은 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에게 엄마이고 아빠였던 할머니

스물세 살에 이미 세 자매의 엄마가 된 나의 엄마는 친정엄마인 할머니에게 육아에 대한 많은 부분을 의탁했다. 부모님이 경기도로 이사를 갈 때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두 동생만 데리고 갔다고 한다. 어린 나는 부모와의 이별에 슬퍼하지 않고 할머니의 등에 달랑달랑 업혀 연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얼마 후 다시 합친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사는 동네에 완전히 정착하여 할머니와 자주 왕래하며 지냈다. 초등학생일 때까지 할머니와 가까이 지낸 후 중학교 다닐 때 잠깐 떨어져 살다가, 부모님이 빚쟁이를 피해 타지로 떠난 후에는 다시 할머니와 살았다.

첫 손녀라 그랬는지, 실제로 나와 있던 시간이 많아 정이 들어서 그랬는지 할머니는 나를 각별히 아꼈다. 어릴 때부터 한숨을 자주 쉬는 내가 마음의 병을 얻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동생이 어느 날은 할머니가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만 끓여주고 자신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는 안 끓여준다고 투덜거렸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할머니는 나에게 결혼하지 말고 혼자 편히 살라고 하셨다. 결혼하고 나서는 아이 낳지 말고 남편이랑 둘이서만 알콩달콩 편히 살라 하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엄마이고 아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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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좋아하던 할머니, 철의 여인이 되다

○○만물상회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아는 부잣집의 막내아들에게 시집을 간 할머니가 그리 박복한 삶을 살 거라고는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할아버지는 매우 느긋한 성격의 사람이었는데, 술만 마셨다 하면 성격이 180도 바뀌었다. 평소에 말 한마디 없던 할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폭군으로 변해 쇠몽둥이를 들고 잔소리를 하는 할머니를 쫓아다녔다.

주사만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노름에도 빠져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해버렸다. 할머니는 이웃집에 가서 쌀을 한 바가지씩 빌려와 엄마와 삼촌들을 먹였다고 했다. 농사도 짓고 윗동네 비료 공장에 일을 다니며 생활을 연명해나갔다. 꽃을 좋아하던 할머니는 어느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가마솥의 뜨거운 물에 풍덩 담근 후 털을 뽑아내는, 손마디 마디가 굵은 철의 여인이 되었다.

할머니의 고생은 자식이 장성하고서도 계속됐다. 맏이이자 외동딸인 나의 엄마는 부모님이 정해준 정혼자를 마다하고 얼굴이 하얗고 반반한 아빠를 만나 활화산 같은 사랑을 했다. 너무 뜨거운 사람들끼리 만났는지 화산은 휴지기가 없이 계속 꿈틀거렸고, 결국엔 터져버려 손녀들만 할머니가 떠맡게 됐다.

위암으로 하늘나라에 가신 할머니 

할머니는 본디 성정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자식들의 일을 지켜보았을 할머니에게 암이 찾아온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했다. 처음에는 배가 아프고 소화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사이다만 계속해서 먹은 할머니는 급기야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위 절제 수술을 받은 할머니는 점점 야위어 갔다. 그때의 나는 위암은 생존율이 꽤 높으니 수술만 하면 살 거라고 느긋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그 몸으로 어린 손주를 키우고 농사를 짓고 평소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복막으로 암이 전이가 되었고,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입·퇴원을 반복했다. 결국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복수가 너무 차 불편하면 응급실에 가 복수를 제거하고 집에 돌아오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더 이상 집에서 간호할 수준을 넘어서자 요양원에 모셨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갔던 호스피스 요양원에는 보라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나무가 있었다. 평소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가 맑은 정신에 봤으면 '알라알라한 것이 참 예쁘다야' 하셨을 그런 나무였다. 그곳에 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가장 늦게 도착한 큰삼촌의 목소리까지 마지막으로 듣고 나서 할머니는 최후의 숨을 내뱉었다.

할머니의 임종이 다가올 때, 동생은 할머니의 얼굴을 쓰다듬고 고맙다며 이런저런 말을 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을 때나 할머니 옆에 조용히 다가가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라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했다. 그때는 슬픔을 단전 밑으로 꾹꾹 눌러 담을 줄만 알았지,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큰 슬픔의 바다는 처음이라, 파도에 떠밀려 허둥지둥거리기 바빴다.

할머니의 죽음 그 이후 

돌아가시고 나서 몇 년간은 할머니를 모신 납골당에 가지도 못했고, 할머니 이야기를 회피했다. 할머니의 ㅎ자만 나와도 코끝이 시리고 눈물이 핑 돌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눈물로 몇 년간을 보낸 후, 또 얼마간은 후회의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와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것이, 용돈을 많이 드리지 못한 것이, 서울의 큰 병원에 모시지 못한 것이 모두 다 후회됐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5년 차 무렵 남편이 진지하게 아이를 가지자고 했다. 딩크족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나중에 남편의 원망이 두려워 또 그만큼 남편이 좋아서 그러자 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할머니가 나의 딸로 태어나길 바라는, 가냘프고 미신적인 바람을 우주의 누군가에게 염원했다.

지인과 만나 2세를 가지길 계획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할머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지인 또한 아버지가 폐암을 앓고 계셨다. 눈물을 펑펑 흘려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물에 흠뻑 젖은 수건을 꽉 짜서 햇볕에 말린 것처럼 마음이 조금은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였다. 할머니의 죽음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조금씩 극복할 시도를 하게 된 것은. 더는 피하지 않고 눈물이 나오면 사람들 앞에서 눈물이 흐르게 놔두었다.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슬픔이지만, 천천히 옅어지기를

지금도 할머니라는 말을 발음만 해도 가슴속에서 물이 차오를 때가 많다. 어제 오랜만에 만난 동네 친구와 옛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할머니 이야기가 나왔다. 내 얼굴에서 할머니가 보인다고. 그 아무것도 아닌 말에 나는 또 눈시울이 붉어져 십여 년 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못난이 인형처럼 얼굴을 구기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래도 이젠 슬픔의 바다에서 허둥거리지 않고 편안히 몸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우는 모습을 보고 친구가 산후우울증이 있는 거 아니냐고 놀렸고, 눈물을 멈추고 그것도 맞지 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릴 만큼 여유가 생겼다.
 
 동해바다를 즐기는 쌍둥이. 과연 누가 할머니의 환생인가!?
동해바다를 즐기는 쌍둥이. 과연 누가 할머니의 환생인가!? ⓒ 김소영

할머니가 나의 딸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지나쳤는지, 딸이 두 명이나 동시에 나에게 찾아왔다. 평온하게 놀고 있는 쌍둥이를 바라보며 누가 할머니의 환생일까 종종 생각한다. 돌아가시고 한 번도 가지 못했던 납골당을 쌍둥이와 함께 다녀왔다. 눈물바다가 될 줄 알았지만, 쌍둥이에게 엄마의 할머니야 하면서 웃는 얼굴로 소개하고 싸간 김밥을 맛있게 먹고 돌아왔다. 

점점 더 괜찮아 지리라. 할머니의 죽음으로 그나마 다행인 것이 생겼다. 나는 삶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죽는 것을 정말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요즘에는 죽고 나면 그래도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깐 그건 다행이지 싶다.

#할머니#임종#위암#슬픔#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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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 비상합니다. 천성이 게을러 대충 쓰고 대충 가르치고 대충 돌보며 살아갑니다. 이 와중에 영생을 꿈꾸고, 나를 위해 모두가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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