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백제 시대가 끝난 후, 서울이 수도의 위상을 찾기까지 무려 9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신라시대 한양군과 고려시대 개경에 버금가는 '남경(南京)'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다가, 조선왕조로 바뀌면서 태조 3년(1394)년 이성계가 이곳으로 천도하며 수도의 위상을 찾아온다.
한강을 서쪽으로 삼은 풍납토성과 남한산에서 뻗어온 44.8m 구릉의 몽촌토성과 달리 조선의 궁성인 경복궁은 북악산을 병풍 삼고, 아래로는 청계천과 한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표본 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조선총독부에 가려지는 수난사를 겪다가 요즘에는 다시금 탁 트여 옛 서울의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큰 시련을 딛고 도약하는 느낌이다.
오늘날에도 서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경복궁으로 가보자.
왕의 영역
경복궁을 대중교통으로 오려면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리면 된다. 4번 출구로 빠져 나와 광화문을 보고 가는 법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바로 통하는 5번 출구로 가는 법이 있다. 타 지역에서 올 때 체력이 좋다면 서울역에서 숭례문-덕수궁-광화문 광장을 거쳐서 들어와도 된다.
나는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과 세종대왕의 동상을 마주한 다음 경복궁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광화문 광장 오른편으로는 교보빌딩, KT광화문지사, 주한미국 대사관, 왼편으로는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서울청사 별관이 눈에 띈다. 광장 좌우로는 원래 조선시대 행정각부에 해당하는 육조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별관의 행정 각 부가 육조의 역할을 일부 이어받은 셈이다.
조선시대 복장을 입은 파수병이 서 있는 광화문, 그 뒤에 있는 흥례문과 근정문을 지나면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국보 제223호 근정전이 보인다. 건물 이름대로 부지런해야 하는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했던 곳이라 좌우로 정렬된 품계석이 권위를 더한다.
그런데 품계석은 생각과는 달리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정조 임금이 어전 앞에 문무백관들이 질서 없이 서 있는 것에 화가 나서 이뤄진 대책인데, 처음에는 당시 어전이었던 창덕궁 인정전 앞에 세워졌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경복궁을 1868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경복궁에도 세워진 것이다.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청산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
근정전 외관은 2층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천정까지 공간이 시원하게 트여 있다. 외관 지붕을 보면 1, 2층 지붕 좌우로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를 잡상이라고 한다. 근정전 외 궁내 다른 건물 지붕에도 배치되어 있는데, 액운을 막기 위해 배치한 걸로 보고 있다.
건물 내부를 보니 어좌와 병풍이 보이는데, 병풍 그림의 이름은 일월오봉도다. 말 그대로 음양을 상징하는 해와 달과 오행을 상징하는 다섯 산봉우리 그리고 그 앞에 소나무와 출렁이는 바다가 있다. 우리나라 그림에만 있는 유형인데, 절대자가 다스리는 세계를 시각화한 것이다.
근정전 뒤에는 왕이 집무를 봤던 보물 제1759호 사정전이 있다.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어좌와 일월오봉도가 있다. 그리고 용과 구름이 얽혀 있는 붉은빛 그림 운룡도가 보이는데, 용인 임금과 구름인 신하가 잘 어우러져 좋은 정치를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경복궁 창건에 관여한 정도전이 말한 대로 항상 생각하며 나라의 이치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는 곳인데, 왕조 역사를 보면 항상 그렇지만은 않았다.
사정전 뒤로는 왕의 침소인 강녕전이 있다. 낮에 부지런함과 생각을 갖춰야 하는 왕은 밤에는 홀로 공부해서 덕을 쌓아야 한다. 강녕전 외관을 보면 특이한 게 있는데, 용마루가 없다. 누군가는 왕이 유일한 용이어서 없다고 하지만, 확실한 건 모른다.
옛 왕의 침소는 앞의 두 건물과 달리 상당한 수난사를 겪었는데, 먼저 중건한 지 9년 만에 불에 타 1888년 다시 지었다. 그러다가 1917년 조선총독부가 불타버린 창덕궁 내전을 재건한다는 구실로 해체, 철거해 70년 동안 공터였다가 1994년에 간신히 복원된 것이다.
왕실 여성들의 영역
강녕전 뒤로는 왕실 여성들의 영역이 시작하는 교태전이 있다. 보통 왕비의 침전으로 알고 있는데, 창건 당시에는 없었다가 세종 25년(1443)에 증축된 건물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왕이 이곳에서 좌승지를 불러 논의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국정을 논의하는 기관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왕비 침전으로 기능한 건 생각보다 상당히 늦은 대원군 중건 이후다.
'교태(交泰)'의 의미는 주역의 11괘인 '태괴(泰卦)'인 '천지교태(天地交泰)'에서 유래했는데, 하늘과 땅이 교통한다는 의미다. 조선 초기에는 오히려 사정전 운룡도의 의미와 가깝다. 그러다가 왕비의 침전이 되면서 왕과 왕비의 조화와 이에 따른 왕실의 안녕을 말하는 것으로 전해진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다 강녕전과 교태전 측면 양 끝에 새겨진 '희(囍)'자를 보면 착각할 만하다. 교태전도 강녕전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다가 같은 1994년에 함께 복원되었다.
교태전 뒤편을 꼼꼼히 보는 것도 잊지 말자. 육각형 담장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기와 굴뚝들이 보인다. 굴뚝에는 갖가지 동물들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했는데, 온돌을 통과한 연기를 배출하는 보물 제811호 아미산 굴뚝이다.
교태전 북동에는 고종의 양어머니이자 순조의 며느리인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이 있다. 침전 뒤쪽에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 당초문과 박쥐문을 정교하게 넣은 담장형 굴뚝이 눈에 띈다. 담장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 특이한 선 문양의 황토색 담 사이로 운치 있는 식물들이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면 선 문양으로 한자를 쓴 것이다. 담장들의 글자를 종합하면 '낙강만년장춘(樂彊萬年張春)'인데, 뭔가 이상하다.
최근 꽃담이 일제강점기 사진과 비교했을 때 엉터리 복원을 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는데, 낙강과 만년 사이 만세(萬歲)가 누락된 데다 그림도 빠져 있다고 한다. 올바르게 복원되면 '즐겁고 건강하게 만세를 사시고, 만년토록 청춘을 누리소서'를 뜻한다. 조선 조정이 신정왕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동궁, 건청궁 영역과 경회루
자경전 아래로는 왕실의 부엌 역할을 한 내소주방과 외소주방 그리고 왕세자와 세자빈의 거치인 자선당과 비현각이 있다. 소주방도 1915년에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이곳에 개최하면서 철거되는 수모를 겪다가 재건 되기까지 1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봄과 가을이 되면 이곳에서 궁중병과와 약차를 체험할 수 있으니 참고하자.
자선당과 비현각도 일제에 의해 수모를 겪었는데,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머물렀던 처소인 자선당은 조선물산공진회 이후 도쿄 오쿠라 호텔의 별채가 되었고, 세자의 업무와 학습공간이었던 비현각은 일본인에게 팔려가 별장 남산장(南山莊)으로 변모했다. 전자는 관동대지진으로 후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실되었다가 세기말이 되어서야 둘 다 복원되었다.
자경전 서쪽 돌담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최근에 복원되어 아직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흥복전과 고종이 나랏일을 의논했던 당시 모습이 남은 함화당과 신하들과 경서를 읽은 집경당이 있다. 그 뒤로 후원이 하나가 보이는데, 연못 가운데 섬 위에 육각형의 정자와 다리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과 함께 위용을 뽐낸다. 향원정과 취향교다. 2015년에는 향원정 남쪽에서 조선 최초 전기 발전소 터를 발견했는데, 향원정 일대는 어찌 보면 한국 전기 역사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원정 북쪽으로는 상당히 높으신 사대부 가문의 고택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 솟을대문 현판을 보니 '건청궁(乾淸宮)'이라고 쓰여 있는데, 고종과 명성황후가 실제로 기거했던 장소다. 물론 앞에 강녕전과 교태전이 있지만, 짓자마자 곧 불이 난 데다, 주변이 업무와 관련된 장소라 고종 부부도 오늘날 직장인들처럼 사무실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명성황후에게는 비극의 장소이기도 했는데, 을미년에 이곳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홀로 남은 고종은 아관파천 때까지 장안당에 기거했다.
건청궁 북서에는 중국풍이 많이 섞여 있고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태원전이 있다. 태원전에서 다시금 광화문 쪽으로 내려가면 옛 만 원 화폐의 뒷면의 주인공인 경회루가 보인다. 경복궁의 대표 연회장답게 연못 가운데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큰 단일 목조건물이기도 하다. 태종이 완공한 초기 경회루는 이보다 더 더 화려했다고 하는데, 지붕이 이층 구조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한 후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의 사상을 형상화한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북악산을 병풍삼아 지었던 궁궐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그대로 따라갔다. 임진왜란 때 불타 270년 동안 방치되어 범들과 짐승들의 소굴로 전락했던 안타까운 역사를 겪다가, 흥선대원군 때 왕실 권위회복으로 중건되더니 얼마 못 가 일제에게 국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국권이 넘어간 후 다수 전각들이 헐리거나 팔려서 호텔 별관이나 별장으로 전락한 안타까운 역사도 겪었다.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건립되어 70년 동안 경복궁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해방이 되고서도 경복궁은 한국전쟁으로 신음하고 방치되다가, 김영삼 정부의 역사세우기 일환으로 다시금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고종 때와 대비하여 오늘날 복원은 25%까지 이뤄졌다고 하는데, 2045년 2차 복원 사업이 끝나면 경복궁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