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여자가 '미친' 건 어쩌면 이 나라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드라마 속 인물들을 다룬 <나를 키운 여자들>(느린서재)은 온라인서점에서 영화에세이로 분류되지만 나는 다르게 읽었다. 대한민국에 사는 30대 기혼 유자녀 여성이 왜 출산을 계기로 잘 다니던 직장을 나와 혼란을 겪게 되는지 증언하는 사회학 문헌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책은 규범과 관습을 넘어 자기답게 표현하고 살아가는 32편 작품의 여성 캐릭터들을 소개한다. 도저히 하나로 뭉쳐낼 수 없을 것 같이 제각각인 개성과 사연들을 저자 홍현진의 강렬한 개인 서사가 관통해 잘 만든 목걸이처럼 꿰어냈다.

그렇기에 글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상세계 속 여성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넘어 '현실세계 속 여성이 무엇을 겪었는가'에도 귀기울이게 된다.

출산으로 부서지고 깨진 모범시민
 
 저자는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양육과 가사의 부담을 더 많이 짊어져야 하는지,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과 육아 중에서 하나를 택할 것을 강요받는지" 납득되지 않았다. 사진은 한 베이비페어에서 참관객들이 출산 육아 용품들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저자는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양육과 가사의 부담을 더 많이 짊어져야 하는지,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과 육아 중에서 하나를 택할 것을 강요받는지" 납득되지 않았다. 사진은 한 베이비페어에서 참관객들이 출산 육아 용품들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저자는 국가가 바람직하게 여기는 생애주기를 착실히 밟아온 사람이었다. 일탈 없이 입시에 매진해 서울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에 성공했다. 역시나 성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청년 취업률과 혼인율, 출산율에 기여했다.

모범시민처럼 살아온 그는 2016년 출산을 기점으로 나라를 배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육아휴직 뒤 해보고 싶은 일 대신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춰 퇴근할 수 있는 직무로 복직했다. 유아기엔 자주, 불시에 병원 갈 일이 생겼다. 남편은 회사일로 바빴다. 양가 부모님은 멀리 떨어져 살았고 베이비시터는 한계가 있었다. 직장 연차휴가와 재택근무로는 메울 수 없는 극한상황이 계속됐다. 

누가 콕 집어 강요한 것도 아닌데 "남편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내가 희생해야겠다", "엄마니까 커리어에 대한 욕심은 잠시 접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아이의 탄생과 상관없이 커리어에서 성취를 이루는 남편이 부러웠다. 저자는 "가족만큼이나 내 일을 통한 성장도" 여전히 갈망했다.

모순된 갈등 사이로 의문이 쏟아져 나왔다.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양육과 가사의 부담을 더 많이 짊어져야 하는지,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과 육아 중에서 하나를 택할 것을 강요받는지" 납득되지 않았다. "이제껏 당연하게 몸담고 있던 세상"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들여 왔던 세계가 모조리 부서지고 깨졌다." 

9년 다닌 첫 직장을 2018년에 그만뒀다. 여기까지 보면 여성이 20대 취업한 후 30대에 경제활동을 그만둔다는 'M자곡선'의 한 사례 같다. 그러나 저자의 선택을 단순히 애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일과 아이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여성들의 지속가능한 일과 삶을 찾아보겠다는 야심찬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해 '기혼여성 고용률 53.5%'라는 통계의 바깥세계로 이탈했다.

이후 재취업, 사이드 프로젝트, 창업 등을 벌이며 국가의 일자리 지표에 복귀했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꿈을 향해 3년여간 쉴 틈 없이 돌진했지만 돌아온 건 과노동, 가족과의 불화, 내외적 갈등, 번아웃, 세 번째 퇴사였다. 또 다시 고용률 그래프에서 나와 144만 명의 경력단절여성(2021년) 중 한 명이 됐다('경력이 끊겼다'고 규정할 순 없다. 그는 여전히 아이를 기르면서 글을 쓰며 분투 중이다).

제대로 미쳐본 여자들이 준 위로와 용기

"내 안에 미친년이 있는 것" 같을 만큼 방황할 동안 저자를 버티게 해준 존재는 '여성이 일하면서도 아이 키우기 좋은 나라'를 약속한 국가가 아니었다.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손바닥 만한 아이폰으로 마주한 영화·드라마들, 정확히는 "나처럼 어딘가 뒤틀린 '미친 여자'"들이었다.

처음 보면 도대체 이들에게 무얼 배울 수 있다는 건가 싶을 정도로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기괴하다. 12년 전에 체조선수로서 딴 동메달을 메고 다니며 왕년의 영광에서 못 헤어 나오는 여자(<더 브론즈>), 8년간의 공무원시험을 그만두고 운동을 시작했는데 인생이 더 꼬여버린 여자(<아워바디>), 아이를 잃고 "그 아이를 원치 않았다"고 고백하는 여자(<로마>), 첫눈에 반한 남자와 결혼한 6시간 만에 이혼한 여자(<체실 비치에서>). 사랑하는데 헤어진다는 여자(<결혼 이야기>)들은 타인의 롤모델은커녕 세상 사람들에게 욕 먹기 딱 좋은 구석들만 갖췄다. 사회가 원하는 모범시민이 아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느린서재)
<나를 키운 여자들>(느린서재) ⓒ 느린서재
 
신기하게도 저자가 펼치는 변론을 듣고 있으면 이들은 비정상이 아닌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마음껏 욕망"하며 경계를 넘어 저 멀리 뻗어나가는 멋진 여자들이 된다. 그리고 근사해진 그녀들 속에서 저자 역시 불안정한 자기 안팎의 세계를 이해하고 힘을 얻는 모습이다. 이왕 미칠 거면 제대로 미쳐보자, 비틀거리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나아가자는 다짐 또한 엿보인다.

실제로 저자는 책 출간 후 쓴 기사에서 "신문기사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그저 '저 여자 뭐야'라고 치부될 여자들의 서사와 맥락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결국은 나를 이해하고 싶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관련 기사 : 이 많은 '미친 여자'들을 어떻게 모았냐고요? https://omn.kr/22hdk)
 
"나도 누군가에게 '쟤 뭐야' 소리를 듣는 여자였다. 안정적인 직장 다니며 애나 잘 키우지, 회사 그만두고 계속 일을 벌이고 번아웃을 겪고 결국 일을 그만두고... 누군가는 내게 욕심이 너무 많다고 했고 누군가는 내게 팔자가 좋다고 했다. 남들의 시선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많이 생각하고 나를 가장 이해 못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영화 속 여자들의 결말은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다. 직장을 잃고, 이혼을 하고, 감옥에 가고, 평생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제대로 미쳐본 여자들의 이야기는 내게 커다란 위로와 용기를 줬다. 안온한 세계를 제 손으로 부수고 나오는 여자들, 눈을 크게 똑바로 뜨고 싸우는 여자들, 경계를 넘어 끝까지 가보는 여자들, 그렇게 해서 이전과는 다른 내가 된 여자들의 서사를 보며 생각했다. '아, 나만 미친 게 아니었구나', '조금 더 미친 채로 살아도 괜찮겠구나'."

예상치 못한 해답과 해방감을 줄 책

국가 입장에선 정부 성과에 도움될 만한 통계 트랙에서 벗어나 둘째·셋째도 안 낳고 '미친 여자'들을 모아 책을 내는 국민이 탐탁지 않을 수도 있다. 혹여 저자가 다시 모범시민으로 돌아와 고용률·출산율에 성실히 기여하길 바란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일·가정 양립이라는 실현불가능한 세계로 유독 여성만을 몰아붙이는 사회에서 정부의 정책 공백은 빈틈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여성의 경력단절 심화가 가슴 아프다'면서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려 하고 주 52시간 노동시간마저 더 늘리는 게 좋겠다는 현 대통령의 모순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애를 낳으라 권장해놓고는 사실상 여성 보고 알아서 키우라고 떠맡긴 국가 때문에 저자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다 내 안의 '미친년'을 발견한 게 꼭 나쁜 결과만은 아닌 듯하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여성 노동자, 여성 시민 등 내게 주어진 모든 정체성을 뒤집어엎고" 싶은 다른 여성들에게 용기를 줄 책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내가 유독 욕심 많은 독한 여자처럼 여겨질 때, 자기밖에 모르는 못된 여자가 된 것 같을 때,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해 미안할 때, 이 모든 원인이 내게 있는 것만 같을 때, 나만 바뀌면 될 것 같을 때, '미친 여자 어벤저스'를 찾아오라. 당신이 예상치 못한 해답과 해방감을 얻을지도 모른다. 혹시 아는가. 나아가 저자처럼 당신만의 솔직한 서사로 또 한 명의 여성을 구원할지도.

P.S : 이 책은 저자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나를 키운 여자들'과 개인적으로 써온 글들을 엮어 완성됐다. 지독한 고난과 방황을 견뎌내며 이 사회에 필요한 여성 서사를 쌓는 데 일조한 저자에게 고생 참 많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지난 연재 보기 (https://omn.kr/1v056)

나를 키운 여자들

홍현진 (지은이), 느린서재(2023)


#나를 키운 여자들#홍현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