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 동은(송혜교 분)은 끔찍한 학교폭력의 피해자다. 가해자들의 부모는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고, 학교는 동은에게 2차 가해를 한다. 피해자를 제외한 학교 공동체의 교육 주체들은 모두 가해자나 방관자다. 돈을 받은 어머니는 동은을 버리고 떠난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공권력은 동은을 보호하기는커녕 가해자들을 훈방한다. 학교와 사법체계가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동은은 결국 사적 복수를 맹세하고 실천에 옮긴다.
현실은 응보적 사법이 아닌 '회복적 사법'
드라마와 달리 현실 속 대다수 학교폭력 가해자는 학교에서 징계를 받거나 경찰·검찰조사를 받은 뒤 형사처분이나 보호처분을 받는다.
가해자에 대한 출석정지, 강제전학, 퇴학 같은 징계만으로는 피해자의 회복을 통한 학교 공동체의 재통합을 이룰 수 없다. 하지만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고 가해자를 신속하게 징계하는데 집중한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는 제목에 담긴 뜻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난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원한 것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였다. 학교폭력 피해자들은 현실적인 보상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원했다."
"사과로 얻어지는 게 무엇일지 고민했는데, 얻는 게 아니라 되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폭력의 순간에는 인간의 존엄, 명예, 영광 같은 걸 잃게 된다. 사과를 받아내면서 비로소 원점이 되고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피해자들의 '원점이 되는 상태'를 응원한다는 점에서 작품 제목을 '더 글로리'로 정했다"
진심 어린 사과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자기반성에서 나온다. 따라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상처 치유를 위해 충분한 시간 동안 진정성 있는 성찰을 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보호처분은 가해자에 대한 응보가 아니라 가해자의 교화와 재사회화가 목적이다. 가해자가 보호관찰을 받으면서, 또는 소년원에 수용돼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해야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과와 보상, 화해를 통해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피해자는 드라마처럼 가해자가 되거나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학교폭력 피해자 현의 이야기
몇 년 전, 지방의 한 보호관찰소는 현(가명, 여, 13세)의 결정전 조사서를 작성했다.
보호관찰소의 소년 대상 '조사' 업무는 법원·검찰 등의 요청으로 보호관찰관이 피의자인 소년에 대한 범죄전력, 사회환경, 재범 위험성 등 제반사항을 객관적·과학적으로 조사해서 처분결정의 기초자료로 제공하는 업무이다. 소년부 판사는 이 '결정전 조사서'를 기초자료로 활용하여 보호관찰 처분·소년원 처분 등의 보호처분(1호~10호)을 결정한다.
현에 관한 결정전 조사서의 서두는 다음과 같았다.
피조사자는 2021. 0. 0. 00병원 정신과 병동에 행정입원됨. 반복적 가출, 원조교제, 성매매 등 피조사자의 왜곡된 성 의식으로 성범죄 피해 우려가 높아 보호 조치됨. 보호자인 부는 사망, 왕래하는 친인척 없음
당시 13세 촉법소년이었던 현의 죄명은 '사기'였다. 수중에 돈이 없음에도 외모를 꾸미고 싶은 욕구 때문에 미용실에서 펌 등을 한 뒤 그 금액을 지급하지 않았다. 현은 이 사건으로 소년부 법정에서 단기보호관찰(1년) 처분과 수강명령 처분을 받았다.
현이 유아기 때 부모는 이혼을 했고, 현은 운전이 직업인 아버지와 둘이서 살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뒤 현은 보육시설에 입소했다. 5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 이유는 보육원에서 살고, 장애인 친구를 도와주며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소위 잘 나가는 친구에게 찍혀 왕따를 당했다. 노는 친구들은 수시로 현을 괴롭히고 폭행했다. 정상적인 가정의 양육과 학교의 보호를 받지 못한 현은 학교와 보육원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가출을 반복하며 수많은 쉼터를 전전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만난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원조교제 등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정신과 병동에 보호조치 된 현은 중학교 2학년 때 조현병과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았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학교는 학업 유예되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술에 만취되어 버려진 상태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보호관찰 담당자인 나와의 첫 면담에서 현은 말했다.
"전 폭력적이에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가출을 했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어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지만, 현은 자신을 폭력적이라고 표현했다. 목 등에 새겨진 문신들은 현이 스스로에게 가한 폭력과 위로의 흔적이었다. 학교폭력과 소년범죄는 가정의 해체, 양극화, 공교육의 붕괴, 물질만능주의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병폐가 근본적 원인이라는 점에서 학교와 사회는 현의 아픔을 외면한 방관자다.
회복적 사법이란 무엇인가
소년법의 이념과 목적은 응보주의에 기반한 엄벌이 아니다. 소년의 건전한 성장을 돕는 회복적 사법이다. 소년법의 보호처분은 교육적·치료적 처우에 기반한 교화 및 재사회화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에서 타인에게 신체적·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준 소년은 건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의무는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응보적 사법에서 가해자는 처벌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책임을 지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진정한 책임은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리고 응보적 사법에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만이 있고, 가해자가 일으킨 피해에 대한 회복이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가해자 자신과 공동체와의 관계, 피해자와 공동체와의 관계가 훼손되고 회복되지 않는다. 가해자는 범죄자라는 낙인(label)이 붙어서 관계는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다.
우리는 사법이라는 절차와 시스템을 통하여 문제가 해결되고, 피해가 회복되며, 잘못을 바로잡기를 희망한다. 그것의 결과가 정의이다. 하워드 제어는 피해자와 가해자, 지역공동체를 회복시켜서 범죄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전환시키는 것을 꿈꾸고, 그러한 결과를 생산해내는 사법 시스템을 "회복적 (restorative)"이라고 하고, 회복적 사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 한영선, <소년보호기관 회복적 사법 실천을 위한 연구 - 회복적 서클 메뉴얼>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이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위해서는 교화 및 재사회화를 통한 가해자의 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소년범죄 예방 및 재범 방지를 위한 인프라 확충이 중요하다.
우선 소년 보호관찰 전담 인력을 증원해 보호관찰을 더욱 활성화·내실화하고 소년분류심사원을 증설해야 한다. 소년분류심사원은 재판을 앞둔 소년을 4주 동안 수용해 비행원인을 분석하고, 인성교육과 상담을 통해 판사에게 처분의견을 제출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소년이 유해환경 및 비행친구와 차단된 상황에서, 자신의 범죄와 피해자의 아픔을 성찰하도록 교육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할 기회를 주고 있다.
최근 법무부가 발표한 소년범죄 종합대책에 따르면, 법원이 소년보호사건 심리 기일·장소를 피해자에게 통지하는 제도와 소년사법절차에서의 피해자 참석권 보장 규정이 신설될 예정이다. 현재 피해자는 가해 소년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도 모를만큼 소년사건 처리절차에서 소외되기 때문에 나온 개선책이다.
국가는 보호처분을 실효성있게 집행하여 가해 소년이 피해자의 회복을 돕도록 교육할 것이다. 학교와 지역사회도 피해자의 치유와 공동체의 재통합을 위해 회복적 사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