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엄마의 우울증이 그때 시작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무 오래 따뜻하지 않았다>를 읽다 든 생각이다.
이 책을 쓴 차현숙은 소설가다. 1994년 <소설과 사상>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몇 편의 소설을 더 발표했는데, 나는 읽어보지 못했다. 그러다 그가 자신의 우울증 일상을 기록한 책을 냈다기에 관심이 갔다. 엄마 생전엔 우울증이란 말만 들어도 싫었는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들여다보게 된다. 자식 다 소용없다.
40여 년, 우울증과의 동거 기간
차현숙은 23세 때 우울증이 발병했다고 한다. 이후로 지금까지 근 40여 년을 우울증과 동거하고 있다. 엄마와 비슷한 동거 기간이다. 그런데 그는 아직 60대니 엄마보다 더 오랜 시간 동거해야 할 듯하다. 딱하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아무 것도 못 드시던 엄마가 생각나,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따뜻한 음식을 사주고 싶어졌다. 자꾸 엄마 생각이 났다.
그는 23세 때 우울증이 발병했다고 하지만, 정확히 23세는 '진단을 받은 때'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우울했으니까 말이다. 단지 일상을 지낼 수 없을 정도(침상에서 일어날 수도, 씻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지경)가 되어 오직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던 그때를 발병의 기점으로 삼는다. 진단은 병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임으로.
하지만 그는 되짚어봤다. 어릴 때부터 물고기 비늘에 물이 스미듯 스며든 축축했던 감정들을. 추상처럼 엄하던 엄마, 노동의 고단함으로 웃음을 잃은 아버지,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던 언니에게 둘러싸여 늘 기가 펴지지 않던 어린 마음. 가난한 실림살이로 팍팍해질 데로 팍팍해져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냉골 같던 가족들. 그들 누구에게도 선뜻 기대지 못했던 작은 어깨.
그는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일(배변)을 보고, 부엌은 오직 밥을 짓는 장소고, 엄마는 안에서 살림을 하는 그런 집. 그 꿈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나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사실 나의 첫 우울증은, 다른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이 강박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렇다면 그가 의사로부터 의학적 진단을 받은 때는 23세지만, 자신이 해석해낸 우울증의 발병 시기는 그보다 훨씬 어린아이 때인 것이다.
엄마는 어땠을까. 엄마도 의사로부터 우울증 진단을 받기 전부터 아팠을지 모른다. 어렴풋한 기억들, 미간을 찌뿌린 채 몇 날이고 입을 열지 않던 그날, 몇 날 며칠이고 이부자리에서 나오지 못하던 그날, 부엌 부뚜막에 엉성하게 걸쳐 앉아 연탄가스를 맡던 그날들 속에 엄마는 이미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지 모른다.
차현숙의 우울증이 어린 시절 가난이 쪼그라뜨린 존엄에서 비롯되었다면, 어쩌면 엄마의 발원은 전쟁이 짓밟아버린 인간의 위엄이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피난민이었다. 엄마는 그 소리가 가장 듣기 싫었다고 했다. 엄마에게 피난민이란 호명은 지금의 이주민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차별과 배제와 혐오를 담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너른 철원 평야 지주의 딸이었던 엄마는 피난 중 하도 배가 고파 남의 밭에서 뽑아 먹은 무 때문에(다 먹지도 못하고 한입 베어 물다가),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쌍욕과 귀싸때기를 맞았다. 그리고 던져진 말, "피난민 떼거리들." 당시 매일 무섭도록 퍼붓는 '쌕쌕이'의 폭격을 피해 겨우 몸만 건져 삼팔선을 넘은 엄마와 외조부모가 상거지 신세이긴 했지만, 얼마나 수치스럽고 얼마나 아팠을까.
늙은 부모를 부양해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전실 자식이 셋이나 있는 홀아비에게 스무 살 어린 여자가 시집을 갔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시집살이와 아이들을 간수하는 일은 고됐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때 소원이 하루 딱 세 시간만 자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얼굴과 눈이 노래지는 병을 얻어(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으니 무슨 병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시름시름해도, 누가 대신해 줄 리 없는 무지막지한 농사와 가사로 대꼬챙이같이 말라갔다고 한다.
엄마는 당신이 살아온 일화들을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 재생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자식들은 조금씩 무감해졌다. 같은 얘기를 무한 반복 들으면서 그때마다 눈물 뚝뚝 떨어지는 위로를 주기는 어렵다. 자식들의 점차 심드렁해지는 반응에 섭섭했을 테다. 아버지와의 사이도 좋지 않아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는데,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엄마는 그래도 "그때가, 자식들이 어릴 때가, 제일 좋았다"고 했다. 왜냐고 했더니 "그땐 희망이 있었으니까"라고 답했다. 하지만 우리 자식들은 엄마의 희망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엄마의 남은 희망은 오로지 나밖에 없었다.
누구의 희망이 되는 것은 자신의 희망을 놓아 버려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점점 엄마의 존재가 무거워졌다. 툭하면 죽고 싶다는 것도, 왕복 5시간이 걸리는 신경정신과 진료에 번번이 동행해야 하는 것도, 의사로부터 "우울증은 가족이 많이 배려해야 해요"라는 훈계를 듣는 것도 다 지긋지긋해졌다. 어느 날은 "나도 우울해 죽을 지경이라고요"라고 빽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내게 나도 놀랐다.
차현숙은 딸인 내가 이렇게 속으로 질렀던 비명을 실제로 그의 아들에게 들었다. "나는 엄마가...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엄마는 아프다고 나를 키우다 말았잖아." 그는 그때의 고통을 '비수 같은 말'이라고 적었다.
이를 읽으며 이제 엄마가 돼버린 나는 그가 되어 칼에 베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도 그런 생각 한 적 있었는데'를 되뇌었다. 나도 그랬다. 툭하면 못 일어나고, 툭하면 못 먹고, 툭하면 죽고 싶다는 엄마가 사라졌으면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병든 차현숙과 못된 말을 한 그의 아들 둘 다를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다.
우울증 환자의 가족에게 추천하는 책
한 임상심리 상담사 말로는 가족 내 한 명만 우울증이 오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럴 수 있다. 차현숙의 경우, 그의 언니들과 엄마 모두 우울증을 앓았다. 그들 모두 우울증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정신 질환에는 유전적 영향이 크다. 엄마는 어떤 영향이었을까. 엄마는 후천적 요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인생은 억세게 운이 없게도, 충격과 불행과 비극으로 점철됐으니 말이다. 그가 배태한 우울의 자장 속에 있던 우리 가족 모두도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차현숙의 책 <나는 너무 오래 따뜻하지 않았다>는 우울증에 관한 지적 탐구가 아니다. 그는 다만 우울증 환자로서 어떤 기분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곡진하게 썼다. 자살 충동을 누르려 열 번도 넘게 정신 병동에 자진 입원하며 그래도 살아보려고 발버둥 친 기록이다.
나처럼 우울증 환자의 가족이라면(내 경우 회환의 시간이었다), 작은 공감과 위로가 따를 것이다. 우울증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읽으며 우울증의 지난함과 벗어날 수 없음을 조금 이해하게 된다. 그러곤 우울증 앓는 사람들의 무기력에 퍼부었던 의지가 없다는 둥, 정신 상태가 썩었다는 둥의 막말이 미안해질 것이다.
차현숙은 어느 날 친구에게서 야구 방방이로 얻어맞은 타격 정도의 '쎈' 응원을 받았다고 한다. "힘내. 이것보다 더 더러운 병도 있는데!" 이것은 위로인가 폭력인가? 이 책을 읽고 나면 폭력이라고 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