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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벽 면에 걸어놓은 커다란 세계지도를 틈날 때마다 골똘하게 보는 아이는 바다 건너 먼 나라를 무척 가고 싶어 했다. 그중에서도 1순위는 언제나 영국이었다. 프리미어리그 경기 일정과 결과를 매일 확인하고, 해리포터 DVD를 열 번도 넘게 본 아이이기에. 셰익스피어의 나라이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이 무료인 영국은 나에게도 매력적인 나라였다. 겨울 방학에 아이와 둘이 영국 여행을 가보자 마음먹었다.
           
남이 짜놓은 스케줄에 가이드만 졸졸 쫓아다니는 패키지여행은 진짜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해 자유여행을 가려 했다. 그런데 양가 부모님과 남편은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뉴스에서는 서양인들의 동양인 혐오 공격 사례가 보도되었고, 여행 커뮤니티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소매치기 피해 일화들이 올라왔다.

막상 혼자 열 살 아이를 데리고 13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서 10일 넘게 머물 생각을 하니 그런 소식들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매번 도착지를 런던 히드로 공항을 설정해놓고 저렴한 항공권을 검색만 할 뿐 끝내 구매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토트넘 구장 투어가 포함된 유럽 패키지여행 상품을 택했다. 12일 동안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총 5개국을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먼저 맛보기 여행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며 여행 경험과 기술을 쌓은 후 아이가 좀 더 큰 후에 한 나라씩 자유여행을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냈다. 패키지여행으로 노선을 바꾸었지만 나는 최대한 '우리만의 여행'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행신문' 만드는 법
 
 여행을 가기 전 여행 신문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여행을 가기 전 여행 신문을 만들어보았습니다. ⓒ 진혜련
 
 여행 신문을 가지고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신문을 가지고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 진혜련

우리는 미리 간접 여행을 하면서 여행 신문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여행 일정표를 보고 우리가 가게 될 장소를 '구글어스(Google Earth)'로 살펴보며 그곳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 간단히 적는 것이다. 3D 실사 지도인 구글어스는 내가 실제 그곳에 있는 것처럼 실감 나게 보여줘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 기분이 난다.

그동안 아이와 여행에 다녀온 후 만들었던 여행 신문을 이번에는 여행 전에 만들었다. 거실 바닥에 아이와 마주 앉아 4절지를 펼쳤다. 그 나라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즉 위치, 수도, 면적, 인구, 언어, 화폐, 유명한 것 등을 적고, 국기 이미지를 붙였다. 또한 간단한 인사말과 단어(아침 인사, 저녁 인사, 고맙습니다, 숫자 등)를 조사해 썼다.

우리가 갈 관광지의 이미지를 각각 출력해 붙이고 한 두 줄 정도로 설명을 적었다. 깊게 공부하지는 못하더라도 오리고 붙이고 손글씨로 쓰다 보면 나름의 정보가 쌓이고, 여행지에서 무엇을 특히 더 관심 있게 볼지를 생각하게 된다. 여러 관광 명소 중에서 아이 픽, 엄마 픽을 골라보고 선정 이유와 기대되는 점을 이야기 나누며 자신만의 여행 윤곽을 그려갔다.

방문할 박물관, 미술관의 관심 가는 작품을 홈페이지나 관련 도서를 통해 알아본 후 여행 신문에 기록했다. 대영박물관의 홈페이지에는 꼭 봐야 할 유물들의 목록을 주제에 맞게 보여주고 있어 그것들을 참고했고, 루브르에서 보고 싶은 작품은 <90일 밤의 미술관 :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책을 보며 골랐다.

우리는 이렇게 나라별로 만든 여행 신문을 가지고 유럽 패키지여행을 떠났다. 여행지에서 버스, 기차로 이동하는 시간에 여행 신문을 꺼내 보면서 아이와 퀴즈를 주고받기도 했고, 가이드의 설명이나 새로 알게 된 사실 등을 추가로 적기도 했다. 여행 신문을 손에 들고 있으면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여행자가 아닌 능동적이고 탐구적인 여행자가 됐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바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래도 기억에 오래 남는 건 내 손으로 정리해 놓은 경험과 지식이다.

우리만의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아이는 여행 신문에 보고 싶은 작품을 먼저 적어보고, 루브르 박물관에 갔습니다.
아이는 여행 신문에 보고 싶은 작품을 먼저 적어보고, 루브르 박물관에 갔습니다. ⓒ 진혜련

여행 신문은 여러모로 유용했다. 그 나라의 언어를 몇 가지만 알아가도 현지인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본 조르노(Buon giorno)!"라고 인사하는 아이에게 미소를 보이지 않은 이탈리아인은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 아이는 수많은 작품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을 특히 반가워하며 꼼꼼히 들여다봤다. 아이는 여행 신문에 루브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성안나와 성모자>를 보고 싶다고 적었었다. 아이의 예술 취향은 그렇게 조금씩 만들어져 가는 듯했다.

여행 신문을 만들지 않았다면 아이는 빅벤 앞에서 15분마다 종이 치니 종소리를 한 번 더 듣고 가자고 말하지 않았을 테고, 수네가 전망대에서 마테호른을 바라보는 엄마에게 저 너머는 이탈리아라고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 나라들이 가톨릭 역사를 갖고 있다 보니 어느 나라를 가든 관광 일정에 성당이 많았다. 여행 후 나는 아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알까 싶어 혹시 기억에 남는 성당이 있냐고 물었다. 아이는 말했다.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가 있었던 시스티나 성당이요. 거기 직원이 으스스한 목소리로 계속 'Silence!' 외쳤잖아요."

아이가 "거기가 어디더라. 그 그림 있던데요"라고 얼버무리지 않고 작품 이름과 성당 명칭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여행 신문을 만들고 그곳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와 조금 더 풍부하고, 명료하게 우리만의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여행을 가기 전 여행 신문을 만들어 보자. 어렵지 않다. 구글어스를 켜고 사절지를 펼치면 된다. 게다가 여행을 앞둔 아이는 평소와 달리 꽤 적극적이다.
 
 여행 신문을 만든 아이는 여행지에서 조금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 신문을 만든 아이는 여행지에서 조금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 진혜련

#여행 신문#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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