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동이 아직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나가고 어머니는 독립자금을 마련코자 전후 여섯 차례 고국을 다녀왔다. 초기에는 국내 잠입경로를 임시정부의 비밀조직인 연통제를 따랐다. 한 번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곤경을 겪기도 했다.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차단되면서 택한 밀입국의 길은 더욱 험난했다.
그가 생명을 담보로 하여 가져온 적잖은 독립자금은 임시정부의 운영기금으로 쓰였다. 해가 갈수록 국내의 인심이 변하여 모금이 쉽지 않았다. 상하이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것은 사지(死地)로 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정화의 기록이다.
나는 예관 신규식 선생을 찾아갔다. 충북 청주 출신인 예관은 어려서부터 기개와 재주가 뛰어난 인물로 당시 마흔 초입의 활동적인 장년이었고, 임정의 법무총장이 되기 전에는 구한국군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자강회며 대한협회 등 독립단체에 투신하여 활동했던 신임을 얻은 지사였다.
예관은 시아버님하고도 퍽 가까운 사이여서 우리 집안과는 허물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예관도 익히 알고 있을, 그 동안의 살림 형편에 대해 넌지시 그 속사정을 비추고 나서 말끝에 내 뜻을 밝혔다.
"엉뚱한 소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친정에 가서 돈을 좀 얻어와 볼까 하는데요."
예관은 잠시 머뭇거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다같이 겪고 있는, 그러나 좀처럼 입 밖에 내지 않고 말없이 덮어두고 있는 상처를 드러내보였다는 것이 결코 반가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예관은 내 제의에 된다 안된다 점을 찍지 않고 걱정스러운 듯이 입을 뗐다.
"부인, 지금 국내는 사지(死地)나 다름없습니다. 특히 동농 선생의 일로 해서 시댁은 왜놈들의 눈총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조심해서 처신하겠지만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만에 하나 왜놈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이면 다시는 못나올 것은 고사하고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주석 1)
임시정부 사람들의 생계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조국독립이라는 거창한 명분과 사명감도 당장 먹고 살 길이 없으면 막히게 되고 만다. 다시 정정화의 기록이다.
대의를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여러 지사들도 활동을 위해서는 생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했다. 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에 앞서서 전체 민족의 생존권 획득이 우선되어야 했으므로 개개인의 구차한 살림 형편을 크게 내세우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엌에 드나드는 아낙네의 처지는 또 달랐다. 무엇보다도 먼저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고 명색이나마 밥상에 올릴 식량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일정한 직업이 없고, 땅뙈기 한 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하이에서는 겉으로 떠벌리며 푸념하지 않을 뿐이지 속으로는 애간장을 녹이는 실정이었다.
이름, 명예, 자존, 긍지보다는 우선 급한 것은 생활이었다. 포도청 같은 목구멍이었다. 머리는 내밀고 팔다리라도 내놓을 만한 누더기 한 자락이 더욱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주석 2)
어머니는 김자동이 태어났을 때에도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친가와 외가에 귀여운 아들을 안겨주고 아이에게 고국의 땅을 보여주려는 뜻도 담겼다.
서른 살이 되던 해 여름, 나는 10년 전 망명길에 오른 후 여섯 번 째로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아기를 데리고 할머니를 뵈려고 귀국하는 길이었으므로 여행에는 별로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여섯 달 동안 있었는데, 친정도 전부 서울에 와 있어서 재동에 우리집, 당주동에 사는 작은 오라버지네 집, 충신동에 사는 큰오라버니네 집을 내왕하며 지냈다.
이때 이미 친정의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서울의 인심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마지못해 나를 대하는 몇몇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는 차마 견디기 힘들 정도여서 일본 경찰의 눈에라도 띄어 붙들려 가는 편이 오히려 속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석 3)
주석
1> 정정화, <장강일기>, 56~57쪽, 학민사, 1998.
2> 앞의 책, 56~57쪽.
3> 앞의 책, 9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