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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 없는 사이라도 만나면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사람이 있다. 사람뿐 아니라 풍경도 그렇고 도시도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인연이 없는 곳이지만, 내겐 나고 자란 땅보다 더 익숙해 마실 가듯 자주 찾게 되는 도시가 있다. 경상남도 진주가 그런 곳이다.

30년 전 대학 시절 문화유적 답사차 진주성을 찾은 게 처음이었다. KTX는커녕 고속버스 노선도 많지 않았던 그때, 진주는 사실상 서울에서 가장 먼 오지였다. 지금이야 내륙을 관통하는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놓였지만, 당시에는 대구와 창원 방면으로 빙 돌아서 가야 했다.

이후에도 진주는 내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인연의 끈'을 던져주었다. 공부하다 우연히 알게 된 인물의 고향이었거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였다. 하다못해 사회적으로 크게 화제가 된 뉴스의 배경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진주를 찾았다.

논개의 영정이 친일파의 손에 그려졌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도 그랬고,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지용의 첩 되기를 자결로써 거부한 기생 산홍을 알게 됐을 때도 그랬다. 지난 2018년 독일에 거주하던 허수경 시인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무작정 진주를 찾았다.

시인은 진주가 고향으로, 경상국립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독일로 건너가 고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곳에 정착했다. 자신만의 미학을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그의 시는 사후에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해마다 경상국립대와 시내 서점 등에선 그의 기일에 맞춰 추모 행사를 연다.

지난 주말에도 진주를 찾았다. 이번엔 순전히 '어른 김장하' 때문이다. 지난 설 연휴 때 공중파를 통해 방송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유튜브로 세 번이나 반복 시청했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이 각박한 세상에 설마 저런 분이 있겠느냐는 의심병이 도졌다.

'돈은 똥과 같아 쌓아두면 악취가 진동하지만, 흩뿌리면 거름이 된다.'
 

평생 사회적 기부를 실천해온 그의 묵직한 일갈이다. 지금껏 자신 명의의 자동차를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이 수백억 자산가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돈으로 거름 밭을 일궈왔다. 내겐 순우리말 '어른'의 참뜻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까지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사회적 공헌도로 치면 뉴스는 물론, 그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진작 나왔을 법도 한데 말이다. 자신의 선행과 이름을 뽐내기는커녕 "줬으면 그만"이라며 눙치는 모습이 낯설다 못해 당황스러웠다.

명색이 진주가 '교육 도시'를 자처하는 건, 도시 규모에 견줘 걸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는 의미일 테다. 김장하 선생은 그 인재 중 한 사람임과 동시에 인재들을 길러낸 '산실'이었다. 화면 속 수많은 '김장하 장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그의 선한 영향력을 실감하게 된다.

'말은 마음의 그림'이라고 했던가. 무심한 듯한 그의 말은 한없이 온화하고 자상하지만, 곱씹을수록 매서운 죽비가 되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가 말로써 펼쳐 보인 '마음의 그림'은 지금껏 우리가 잊고 살아온 공동체적 가치와 부유층의 도덕적 의무를 새삼 일깨워준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남들처럼 성공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하는 한 '김장하 장학생'에게 건넨 그의 대답은 순간 나를 울컥하게 했다. 단지 제자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성공의 진정한 의미를 반추하도록 한 것이다. '평범'이라는 말이 '성공'이라는 말과 대조되어 한참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곧장 스마트폰을 켜서 카톡 상태 메시지를 바꿨다. '성공에 목매단 사회에서 실패자는 비도덕적 인간으로 낙인찍히게 된다'고 적었다. '새로운 도덕의 기준이 성공이라면, 실패자는 비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벨기에의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의 경구를 원용한 거다.

데모하다 수배당한 제자에게 그것도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라며 보듬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말하는 '어른 김장하'. 보란 듯이 성공해서 그에게 진 빚을 갚고자 했던 제자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열심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언론의 인터뷰조차 손사래 치는 그분을 감히 뵐 수 있으리란 생각은 애초 없었다. 그저 다큐멘터리 화면에 등장하는 그의 자취를 순례하듯 따라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 전국적 화제가 된 만큼 진주 시내 어느 곳엘 가도 '어른 김장하'의 훈훈함이 봄기운처럼 스며있을 거라 여겼다.
 
 지난해 5월 문 닫은 남성당 한약방의 현재 모습. 내비게이션엔 나오지 않는데, 촉석루와 인접해 있어 찾아가기 어렵진 않다.
지난해 5월 문 닫은 남성당 한약방의 현재 모습. 내비게이션엔 나오지 않는데, 촉석루와 인접해 있어 찾아가기 어렵진 않다. ⓒ 서부원
 
먼저 지난해 5월 문 닫은 한약방을 찾았다. 셔터가 내려진 텅 빈 건물 앞에서 잠깐 고개를 숙였다. 존경심을 담아 그에게 건네는 문안 인사인 셈이다. 쇠락한 구시가의 한가운데 초라하게 서 있는 낡고 거뭇한 3층짜리 건물이 그의 검박했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곳에서 자동차로 5분 남짓 거리에 백촌 강상호 선생의 묘소가 있다. 일제강점기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부르짖은 형평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지역의 내로라하는 지주 출신으로, 당시에도 최하층 천민으로 대우받던 백정들의 신산한 삶을 보듬어준 근대적 지식인이었다.
 
 주민들이 세운 '시덕불망비'. 백촌 묘소와 김장하 선생이 세운 묘비석이 뒤로 보인다.
주민들이 세운 '시덕불망비'. 백촌 묘소와 김장하 선생이 세운 묘비석이 뒤로 보인다. ⓒ 서부원
 
그곳엔 자신의 선행이 외부로 알려지는 걸 극구 꺼렸던 김장하 선생의 품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물이 있다. 봉분 바로 곁에 세워진 묘비석이 그것이다. 무덤의 주인에게 바치는 헌사만이 소박한 필체로 적혀있을 뿐, 여느 것과는 달리 언제 누가 세웠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모질고 풍진 세월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라는 문장 옆에 조그맣게 '작은 시민'이라고만 새겨놓았다. 다른 곳이라면 기부자의 이름이 앞뒤 양옆에 빼곡할 텐데 말이다. '작은 시민'이 김장하 선생이라는 사실도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났다.
 
 백촌 묘소의 묘비석 뒷면. '모질고 풍진 세상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는 문장 옆에 '작은 시민'이라는 글귀가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백촌 묘소의 묘비석 뒷면. '모질고 풍진 세상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는 문장 옆에 '작은 시민'이라는 글귀가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 서부원
 
그전까지만 해도 묘역은 찾는 이가 아무도 없어 방치돼 있었다고 한다. 백촌의 위대한 업적이 좌익 인사라는 오해와 말년의 가난으로 인해 지워지고 잊힌 것이다. 신분 해방과 평등을 추구했던 그가 숨을 거둔 1957년은 서슬 퍼런 반공주의가 사회를 옥죄던 야만의 시대였다.

묘소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시덕불망비(施德不忘碑)'도 눈길을 끈다. 곳간을 열어 주민들을 구제한 백촌 집안의 내력을 보여준다. 얹은 지붕돌은 물론, 빗돌의 마모가 워낙 심해 새겨진 글자조차 흐릿한데 그동안 백촌이 당한 온갖 멸시와 수모를 짐작하게 한다.

잊힌 백촌을 기억하고 묘소를 찾아 묘비석을 세운 탓일까. 김장하 선생은 한 시민으로부터 느닷없이 '빨갱이'로 내몰리기도 한다. 막무가내의 욕설에 발끈할 법도 하건만, 좀체 화를 내지도 않는다. 말로 대응하기보다 우직하고 일관된 행동으로 자신의 소신을 실천할 따름이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다.'


백촌의 묘소에서 새삼 형평운동의 정신과 김장하 선생의 철학이 맞닿아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제강점기 백촌이 열망했고, 지금 김장하 선생이 바라는 세상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회적 경제적 차별과 극단적인 이념의 대립이 없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곳간을 열어 주민을 구제하고 기꺼이 백정의 편에 선 백촌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학생들을 위해 기부를 실천해온 김장하 선생은 과거와 현재진행형의 역사가 되어 손을 맞잡고 있다. 인근 남가람공원에 세워진 형평운동 기념탑의 조형에 담긴 의미도 그렇게 읽힌다.
 
 남가람공원 내 세워진 형평운동 기념탑. 왼쪽 탑의 자유와 평등을 새긴 부조와 손 맞잡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남가람공원 내 세워진 형평운동 기념탑. 왼쪽 탑의 자유와 평등을 새긴 부조와 손 맞잡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서부원
 
기념탑의 손 맞잡은 남성과 여성이 형평운동의 정신을 상징한다면, 백촌과 김장하 선생을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할 성싶다. 시대를 뛰어넘어 두 '어른'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공평과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향해 함께 가자고 말 건네는 형상이다. 공교롭게도, 2023년 올해는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시작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어른 김장하#백촌 강상호#형평운동#경상남도 진주#남성당 한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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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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