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지만 반전인생을 살고 있는 혹은 반전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편집자말] |
티소믈리에 공부를 하면서 티카페에 나온 메뉴판을 잘 이해할 정도의 지식을 얻었다. 물론 열심히 배운 내용을 공부한 점도 있다. 물에 우린 잎을 무슨 재미로 마시나 했는데, 요즘 내가 그러고 있다.
어제 동생이랑 티카페에 가서 대만의 밀키우롱을 마셨다. 동글동글하게 포유된 우롱차는 향과 맛을 마시는 매력적인 음료다. 특히 밀키우롱은 물만 넣었는데 밀크카라멜을 마시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여섯 살이 된 딸아이도 우롱차를 제법 잘 마셨다. 커피와 달리 잎차는 다섯 번이나 우려 마실 수 있다. 차의 매력 중 하나인 가성비가 참 마음에 든다. 차를 마시면서 타인과 나누는 이야기는 이전보다 훨씬 깊고 풍성해졌다.
티소믈리에 공부를 마치니 차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작은 모임을 만들고 글도 쓰고 차도 마시고 싶은 아주 사소한 소원이 생겼다. 커피 러버였던 사람이 어쩌다 차의 매력에 빠진 걸까.
내 인생에 불어온 차의 계절
보통 아이를 임신하면 임산부들이 커피와 술, 담배 등 뭔가 태아에게 좋지 않을 것을 멀리하게 된다. 2018년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커피를 끊지 못하는 임산부 중 한 명이었다. 매일 에스프레소 2잔을 챙겨 먹으며 아이를 출산했다.
임신을 해도 나는 커피만큼 맛있는 음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커피를 사랑하는 삶을 살다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인가. 임신했을 때도 끊지 못한 커피를 끊고 지금은 티러버가 되어 차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지금처럼 디카페인 열풍이 불기 전부터 나는 디카페인 커피를 일찍부터 마셨다. 밤에도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강력한 열망 때문이었다. 디카페인 커피도 누가 볶느냐에 따라 맛이 달랐다. 어떤 카페는 디카페인 커피가 정말 맛없고, 또 다른 곳은 카페인 든 커피만큼 디카페인 커피맛이 좋았다. 내 디카페인 원두의 대부분은 남편 카페에서 얻어 마셨다.
차에는 없는 커피만의 매력은 바로 카페인이다. 카페인이 몸속에 들어오면서 없는 에너지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준다. 긴장감이 떨어진다 싶으면 커피를 마시고 또 마셨다. 그렇게 커피를 마셔도 잠을 잘 잤다.
반대로 남편은 카페인에 취약했다. 조금만 커피가 들어가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면제를 복용했다. 그래서 나는 카페인에 약한 남편 대신에 장금이처럼 맛있는 커피를 마셔주는 사람이 됐다.
그러다 코로나19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다. 1년 2개월 정도 재택근무라는 신세계를 맛보게 해줬다. 코로나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일이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홈카페를 추구했다.
다른 곳에 여행을 가지 않는 이상 카페에 갈 일이 별로 없기도 했다. 무엇보다 밖에서 마시는 커피가 맛있지 않았다. 그걸 왜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하는 괘씸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서 늘 텀블러에 내가 정성스럽게 만든 디카페인 커피를 가지고 다녔다. 밖에서 커피를 사 먹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실 거리를 바꾸는 일
<숲속의 자본주의자>를 쓴 박혜윤 작가의 책은 가랑비에 옷이 젖는 듯한 인사이트를 주었다. 특히 작가의 집에는 커피와 술, 인터넷이 없다는 게 어떤 동기 부여가 됐다.
작가가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끊어가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매일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래서 나도 박혜윤 작가를 따라서 커피 끊기를 시도했다.
매일 마실 거리를 커피 대신 차로 바꿔나갔다. 처음부터 무리하지 않았다. 커피를 디카페인 커피로 바꿔보는 작은 시도부터 해보는 게 좋겠다. 나 역시 2~3년 정도 디카페인과 카페인 커피를 번갈아가며 마셔왔다. 그렇지 않고 일단 커피부터 끊었으면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나는 커피 다음으로 좋아하는 메뉴인 밀크티 위주로 카페인을 줄여 나갔다. 찬장에 쌓인 차로 티시럽을 만들어 최대한 밀크티 마시는 걸 간편하게 바꿨다. 밀크티를 마시다가 지겨워지면 맹물에 차만 우려먹기 시작했다. 그것도 나름 매력 있었다. 어떤 날에는 보리차를, 보리차에 옥수수차를 블렌딩해서 마시는 등 창의적으로 마실 거리를 바꿔나갔다.
어떤 날에는 세계에 나가서 1등한 우전이라는 녹차가 그렇게 맛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길로 우전과 다도 세트를 구입했다. 그렇게 마시는 녹차 한 잔은 왕의 밥상 못지 않게 훌륭했다.
커피를 마시다 차를 마시니 이런 점이 좋았다. 피곤함을 느끼는 몸의 리듬에 맞춰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원래 커피를 마셔도 잘 자는 편이었는데 더 잘 자는 삶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널뛰기하던 감정기복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게 내가 커피 대신 차를 마시고 얻은 가장 큰 효과였다. 덕분에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남편에게 짜증을 일삼은 나날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차를 우리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굉장히 소중하게 대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맛있는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따뜻한 물을 데우고, 찻잎을 넣고 우려지길 기다리는 수고로움이 있다.
하지만 따뜻한 물과 찻잎이 만날 때 피어오르는 향기는 커피향 못지않게 좋다. 찻잎이 물과 만나 대류하는 순간 마저 즐거움을 주었다. 나는 차와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하다.
차를 마시기 시작하니 더 알고 싶어졌다
한참 차에 빠져서 집에 있는 차 재료들로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마셨다. 무언가에 빠지면 그것만 이야기하는 습관이 내겐 있다. 말할 사람이 남편 밖엔 없는데 바깥 일로 피곤한 그에게 못할 짓이었다. 그래서 그길로 차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을 알아봤다.
지난 연말 고향에 내려갔다가 방문한 카페 티퍼니는 블렌딩의 신세계를 맛보게 해준 곳이다. 2022년 골든티어워드에서 티자이너 챔피언십 동상을 수상한 '푸른하늘은하수'는 정말 이름처럼 빛나는 맛이었다. 지금은 아쉽게도 개인 사정으로 사장님이 더이상 가게를 운영하지 않으신다.
티소믈리에와 관련해 차를 정말 사랑하는 사장님이 배운 곳으로 선택했다. 카페 티퍼니 때문에 알게된 곳에서 티소믈리에 교육을 받았다. 4주 동안 1주일에 한 번 매일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차의 모든 것을 알아가는 일이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지난 2월 25일(목) 티소믈리에 이론과 실기 시험을 보고 첫 발을 내디뎠다.
다가오는 3월 6일은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에 해당하는 '경칩'이다.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시기로, 기온이 날마다 오르면서 점점 봄으로 향하게 된다. 실론티의 샴페인이라는 '누와라엘리야' 홍차를 그 시기에 꼭 마셔보라고 새내기티소믈리에로서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