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집에 돌아오니 키우는 고양이가 중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고맙고 기특했다. 요새 집에 오면 반겨주는 유일한 존재가 고양이다. 사춘기 아이들은 데면데면하고 아내 또한 크게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러나 고양이만큼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주위를 맴돈다.
고양이는 내가 노트북 앞에서 일할 때도 온다. 방에서 내가 뭘 하든 관심이 없는 가족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책상에서 나를 바라보는 고양이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 집에서 아빠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내가 처음부터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집이 많지만 1960~1970년생들은 반려동물을 키운 경험이 별로 없다. 그 시절에는 아이들 키우기도 벅찬 시기였기에 반려동물이 있는 집은 거의 없었다. 시골에서는 가축 개념으로 개를 키웠고, 도시에서는 방범용이 대부분이었다.
고양이라는 신세계
그나마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동물은 1990년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았던 병아리였다. 종이박스 안에 들어 있는 병아리는 아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했고, 아이들은 모아 놓았던 용돈을 털어 한두 마리씩 사곤 했다. 병아리들은 집에서 일주일을 못 버텼다. 아이들은 병아리가 죽었다는 사실에 슬퍼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부터 집에서 키우기 힘든 동물이었다(닭까지 키웠다는 사람도 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내가 살던 아파트는 관리규약으로 반려동물을 금지했다. 우리 어머니도 동물이라면 기겁해 집에서 키우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어머니는 TV에서 반려동물과 사람이 함께 침대에 있는 모습을 보면 털 날리는 동물을 어떻게 이불 속에서 데리고 잘 수 있느냐며 경악하셨다. 그런 말을 듣고 자란 탓에 반려동물을 키워 보고 싶다는 생각도 거의 하지 않았다.
2010년 제주에 와서 유기견 한 마리를 입양했다. 그때는 개가 워낙 몸이 아파서 반려동물을 키운다기보다는 거의 간병인 수준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딸이 태어나서 신생아와 개를 같은 공간에 둘 수 없다고 생각해 밖에서 키웠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입양한 고양이는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고양이를 입양하니 좋은 점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50대 아빠가 아이들에게 얘기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공부나 생활 태도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하면 아이들은 대뜸 반항적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빠의 애정 어린(?)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화가 난다. 목소리를 조금만 높이면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고양이와는 부담없이 대화를 할 수 있다.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들어준다. (들어주는 것이라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요새는 하다 못해 밖에서 있었던 일까지 넋두리처럼 한다.
털이 옷에 묻는 것에도 예민했는데...
고양이는 밥도 잘 먹는다. 아이들과는 밥 한 끼 같이 먹기가 쉽지가 않다. '지금은 먹기 싫다', ' 나가서 친구들과 먹겠다'며 갖가지 핑계를 댄다. 뭘 사줘도 고맙다는 표정 대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양이는 사료 봉투만 들어도 내게 온다. 간식이라도 줄라치면 아이가 엄마 모유를 빨듯이 내 손까지 핥는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옷에 털이 묻는 일이 다반사이다. 털이 옷에 묻는 것에 예민했던 내가 그냥 돌돌이로 떼어낸다. 심지어 침대에서 고양이와 함께 잔다. 우리 어머니가 알면 놀랄 일이다.
솔직히 이 나이에 주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 또래 중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친구들을 종종 본다. 동물을 싫어하지만 아이들이 원해서 키우게 됐다고 하소연을 한다.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한다며 불만도 토로한다. 그래서 싫냐고 물어보면 또 그건 아니란다.
뭐가 그리 좋냐고 물어보면 "아이들은 다 컸다고 눈도 안 마주치는데, 반려동물은 나 왔다고 반가워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간식이라도 갖고 들어가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뭐라도 사주고 싶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동물을 키우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다. 쉰 살이 넘어 반려동물을 키우면 소외받고 외로운 가장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몬딱아재'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