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군산야구 100년사>(2014) 발간 후에도 계속 추적한 끝에 양기준·양기철이 친형제라는 사실과 두 형제의 대구 복심법원 판결문, 1919년 7월 12일 자 <신한민보>(재미 한인단체 발행) 기사, 양기준의 한지의사 면허 교부서(1932년 조선총독부) 등을 찾아 유족에게 전하였고,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는 소식도 접하였다. 두 형제의 누이(양마리아)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던 필자는 최근 임영숙(양마리아 손녀) 씨를 만나 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그 자료를 토대로 가슴 아픈 가족사를 정리했다.[기자말] |
[기사 수정 : 14일 오전 9시 9분]
위 사진은 양응칠 장로 가족사진이다. 임영숙(양마리아 손녀)씨에 따르면 두 사내아이는 친형제(양기준, 양기철)이고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아는 큰딸(양마리아)이다. 그해 양마리아는 열두 살, 양기준은 아홉 살, 양기철은 여섯 살이었다. 신문물을 일찌감치 받아들인 양 장로는 훗날 두 아들을 군산 영명학교에 나란히 입학시킨다.
성장한 양마리아는 멜볼딘여학교 사감(舍監)으로 재직한다. 그녀는 1914년 인텔리 청년 임옥빈(任鋈彬)과 혼례를 올린다. 당시 임옥빈(1893~1919)은 군산영명학교 고등과(4년제) 졸업생으로 결혼 이듬해 영명학교 특별과(2년제)에 진학한다. 영명학교 특별과는 지금의 대학 과정으로 졸업 후에는 주로 교직이나 세브란스 의료원 등에 취업하였다.
임옥빈은 1917년 군산영명학교 특별과 졸업하고 모교 교사로 근무한다.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는 1902년경 서양 선교사들이 구암리(군산 선교스테이션)에 설립한 미션스쿨이었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대부분 민족주의자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두 학교는 군산을 비롯한 인근 지역 신학문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면서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양기준은 영명학교 졸업 후 구암병원(군산 예수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하게 되고, 양기철이 졸업반이던 그해(1919) 3·1만세운동이 일어난다(관련 기사:
야구책 만들다.. 독립유공자 형제를 발견했습니다).
거국적으로 저항했던 3·1만세운동. 군산 지역은 그해 3월 5일 처음 궐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세운동은 군산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교사, 학생, 구암병원 직원들이 모여 서래장터 장날(6일)로 계획했으나 이두열 등 교사들이 일본 경찰에 잡혀가는 바람에 시위가 하루 전날(5일) 시작되어 '서래장터(설애장터) 만세운동' 혹은 '3·5만세운동'으로 불린다.
만세운동과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
그날의 만세 시위는 많은 시민이 동참하면서 성난 들불처럼 타올랐다. 곧바로 군산경찰서 순사들이 출동했고, 학생과 시민이 줄줄이 연행되었다. 경찰은 가담 정도에 따라 단순 가담자와 주동자급으로 분류하고 구치소 입구에 태극기와 십자가를 펼쳐놓았다. 그리고 태극기 밟고 지나가는 자는 석방하고 거부하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일제 경찰의 협박은 다음 날 실행으로 옮겨졌다. 미성년자는 태형(笞刑)을 가한 뒤 석방하고, 다시는 만세운동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사람은 방면하는 대신 끝까지 조선 독립을 부르짖는 사람은 감옥을 살게 했던 것. 특히 주동자급을 별도로 분류해 전신에 폭행을 가하는 등 혹독하게 취조하였다. 경찰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던 양기준·양기철 형제는 대구 감옥에서 각각 6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영명학교 교사 신분으로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임옥빈 선생도 열악한 구치소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였다. 임 선생은 혹독한 취조를 보름 가까이 받았으나 옥고는 치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인사불성에 이르자 경찰이 풀어줬던 것. 아래는 임영숙씨가 전하는 당시 정황이다.
"일제 경찰의 구타와 고문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했다고 합니다. 연일 잠도 재우지 않고 온갖 고문과 구타, 협박을 가하면서 며칠씩 조사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많은 시민과 학생이 죽어갔죠. 할아버지(임옥빈)는 보름 가까이 이어진 고문으로 인사불성이 되자 귀가조처 받았으나 회복을 못 하고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어필은 대일본제국에 반하는 행위로 몰아 즉각 추문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죠.
고문당하다 풀려난 사람 중에는 시구(屍軀)가 되어 구루마에 실려 나오거나 거동이 어려운 중상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은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어갔죠. 거사가 일어난 지 한 달여 후에는 조사를 마무리하고 재판이 진행됐지만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죠. 모진 고문으로 이미 사망했거나 불구가 되어 거동조차 못 하는 사람에게는 재판 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임씨는 할아버지(임옥빈)에 대해 전혀 모르다가 3년 전 소식을 듣기 시작했단다. 3·1만세운동은 알았어도 군산 3·5만세운동(서래장터만세운동)은 몰랐다는 것. 그러다가 자료와 증언을 통해 할아버지가 군산영명학교 고등과(2회)와 특별과(6회) 졸업한 사실, 결혼 후 3·5만세운동 주도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문초당한 이야기, 온갖 고문으로 인사불성 된 채 풀려나왔고,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사실 등을 하나씩 알게 됐다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하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듣고 깜짝 놀랐죠. 군산 같은 시골에서 독립운동 했다는 그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만세운동도 서울에서만 일어났던 것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처음엔 앞뒤가 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 중에도 군산 3·5만세운동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더욱 놀라웠죠."
만세운동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우려한 일제는 재발 방지를 위해 민심 수습에 나섰고, 거사를 주관했던 영명학교에 대해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선 특별과를 폐과하고 고등과를 중단시켰다. 이후 영명학교는 일제의 집중 감시를 받으면서 중등과 위주로 운영되다가 1940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했다.
임옥빈 선생 사망일이 '예수 탄생일'인 이유
임옥빈(1893~1919) 선생 사망일이 관련 서류에 12월 25일로 기록된 사연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창졸간에 돌아가시고 경황없이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몇 달이 쏜살같이 지나갔던 것. 그러다가 어느 날 호적을 정리하려니 정확한 사망일을 알 수 없었다. 결국 가족회의 끝에 '부활'의 상징인 '예수 탄생일'을 제삿날로 정했다고 한다.
"아버지 가족사진에서 할아버지 모습은 뵐 수 없습니다. 이 사진이 유일하죠. 고초 겪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너무 빨리. 아버지가 갓난아기 때 할아버지가 변을 당하셨거든요. 그래서 아버지는 명절 때마다 형제들이 모이면 '너희는 참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 하고 불러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시면서... (울먹임)"
임씨는 몇 년 전에도 군산을 다녀갔단다. 부족한 기억의 퍼즐을 보완해줄 단서라도 찾아볼 절박한 심정으로 구암동 일대와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등을 돌아봤으나 기존 자료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3·5만세운동 희생자 명단에 이름(임옥빈) 석 자라도 올라 있었으면 그토록 억울하거나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허탈해했다.
안타까운 점은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실조차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 임씨는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와 할아버지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 한 장을 바탕으로 조각보 만들 듯 하나씩 맞춰가며 설레기도 하고, 실망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덧붙이는 글 | 참고 문헌
임영숙 증언록(‘아픈 가족사로 듣는 3·5만세운동’, 저자: 복병학 著). <군산 제일고 100년사>(2012), <군산야구 100년사>(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