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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 개인 메일함에 들어가보니 '엄마 아빠 결혼 기념일'이라는 알림 메일이 보였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이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더라고요? 오늘 어떻게 지내셨어요?"
"응, 결혼기념일이라고 같이 나가서 외식하고 아빠는 약속 있어서 나가시고 나는 목욕하러 왔지."

"오늘은 두 분 안 싸우셨어요?"
"안 싸웠다. 근데 니네 아빠는 왜 그러냐? 니가 만들어준 트레이닝복 바지 편하다고 주야장천 그것만 입고. 파자마를 하나 사주고 싶은데 니네 아빠는 파자마도 안 입잖아. 실내복 한 벌 사려고 보니 그것도 14만 원이나 하더라."


아빠는 옷차림에 신경을 안 쓰신다. 양복바지에 칼라 티셔츠, 그 위에 잠바. 학창 시절 고등학교에서 보던 교무부장 선생님 스타일이 딱 우리 아빠다. 옷에 돈 쓰는 것도 싫어하신다. 내 옷은 사지 말라고 손을 저으신다. 그렇지만 취향은 확고해서(세련된 취향이라고는 안 했다) 아무 거나 입지도 않으신다.

"엄마, 내가 아빠 파자마랑 집에서 편하게 입으실 실내복 한 번 만들어 볼게요. 내가 만들어드린 옷 편하다고 잘 입으신다면서요. 나는 주말이 되어야 바느질을 하니까 내일 바로 대령하지는 못하지만 아빠가 당장 입을 옷이 없는 건 아니니까 못 마땅해도 조금만 참아보세요."

오랜 세월을 함께 산 부부에게는 그들만의 맥락이 있다. 그 맥락은 맥락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작동하지 않는다. 같은 것이 입력되어도 맥락 함수를 통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성향을 가졌더라도 딸이 하는 말은 고깝게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서로의 편을 들지만 어느 정도는 서로의 배우자를 이해하기도 하는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대나무숲이다. 엄마와 나는 전화로 수다를 떨며 서로의 배우자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17년 만에 꺼낸 파자마 바지 패턴

전화를 끊고 내 원단을 뒤져보았다. 무슨 옷을 만들려고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천들을 꺼내 손으로 쓸어보고 꼭 쥐어도 본다. 파자마를 매번 다려 입을 순 없으니 주름이 쉽게 가지 않을 천을 찾는 것이다. 천의 디자인은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촉감은 파자마로 나쁘지 않을 원단을 찾았다. 작년 가을에 트레이닝복을 만들 생각으로 샀다가 만들지 못하고 묵힌 천도 발견했다.
 
 파자마 한 벌
파자마 한 벌 ⓒ 최혜선
 
먼저 파자마 바지부터. 내가 옷을 만들어 입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제일 먼저 만들어본 바로 그 파자마 바지 패턴을 다시 꺼냈다. 14년 만이다. 처음 만들 땐 손바느질로 했다. 재봉틀을 사도 되나, 내가 만든 게 정말 입을 수 있는 옷이 되나 궁금해서 알아보려고 그랬던 것이다. 한 땀 한 땀 박느라 다리 한 줄 완성한다고 한나절이 걸린 파자마였는데 이제는 몇 시간이면 재단부터 봉제까지 끝난다.

상의 만들 천이 부족했다. 원래는 민소매, 반바지 상하복을 만들려고 2마를 사뒀던 천이라서 그렇다. 긴바지로 만들다보니 상의는 앞판까지만 나왔다. 또다시 원단산을 뒤져 반팔티 만들려고 사둔 검은색 얇은 천을 찾아냈다. 이걸로 뒷판과 소매를 완성하면 되겠다.

옷을 만들면 이런 일이 많다. 디자인이 제일 예쁘게 나오도록 만드는 것보다는 일단 짜집기해서 한 벌이 나오는 방향으로 완성하는 일 말이다. 이 옷을 본 딸의 반응은 이랬다. '디자인은 딱히 마음에 안들어도 촉감이 좋아서 결국 입게 되는 옷이 있는데 이게 그런 옷이네요'라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엄마가 만든 옷을 15년간 입어온 소녀는 엄마 마음을 귀신같이 안다.

다음은 아빠 실내복. 저번 주말에 재단한 천을 이번주에 완성하려고 보니 아뿔싸, 앞판만 두 개를 재단했다. 낭패다. 이 천은 처음부터 상하복을 만들려고 산 터라 한 벌이 다 나오긴 하지만 뒤판을 새로 재단할 만큼은 남지 않았다.
 
 실수 만회하기
실수 만회하기 ⓒ 최혜선
 
별 수 없이 앞판과 뒤판의 차이만큼 새로 재단해서 떼웠다. 연결한 시접이 살에 닿지 않도록 얇은 천을 한 겹 덧대 두었다. 가만? 이거 비싼 티 등쪽에 반달모양 안감 한 번 더 대주는 거랑 비슷하네? 공장에서도 나 같은 실수를 해서 잘못 재단해 놓은 분량 살리려고 한 궁리 아니었을까? 괜한 생각을 해본다.

만들어서 입어보니 생각보다 사이즈가 작다. 이 티 패턴을 오랜만에 만든 데다가 이번에 만든 천은 전에 만들었던 옷들보다 두께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L사이즈로 만들었는데 내가 입어봐도 아빠 옷 얻어 입은 느낌이 안 난다. 어쩔까 하다가 일단 보내기로 한다.
 
 실내복
실내복 ⓒ 최혜선
 
어서 빨리 피드백을 받고 싶다

주식도 먼저 정찰병으로 한두 주 사서 가격 움직임을 본 다음에 본격적으로 투자를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는데 아빠 실내복도 앞으로 제대로 만들어 드리려면 이 첫 버전이 가서 피드백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버전을 만들 때 어떤 점이 좋았는지, 별로였는지 반영해서 고칠 수 있을 테니까. 혹시 안 맞으면 뒀다가 친정에 갔을 때 내가 입어도 되니 실패해도 리스크는 제로에 가깝다.

비록 천 부족과 실수의 콜라보로 점철된 프로토타입이지만 부모님 집에 도착하면 딸이 아빠를 생각하며 주말의 시간을 다 바쳐 만든, 눈에 보이지 않은 사랑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난 옷으로 보일 것이다.

언젠가는 절개가 많이 들어가는 등산복 패턴으로 아빠 트레이닝복을 만들어드린 적이 있다. 그때 돌아온 답이 '전문가 솜씨가 다 되었네, 근데 안 편하네~'라는 것이었다. 아빠가 이런 스타일을 싫어하시나? 절개가 많아서 입었을 때 편치 않으셨나? 속앓이를 했는데 알고보니 일하는 딸이 밤새 만들었을 걸 생각하니까 마음이 안 편하다는 말씀이었다.

"걱정마세요. 좋아하니까 합니다. 할 만하니까 합니다."

그 뒤로도 꾸준히, 딸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만 하니까 걱정 마시라는 이야기를 해드렸다. 이제는 실력이 늘어서 고무줄 바지쯤은 껌이라고 허풍도 쳤더니 요즘은 걱정을 좀 덜 하시는 것 같다.

이 옷을 받으시고 딸아, 아빠는 길이가 어디까지 왔으면 좋겠고 고무줄은 좀 더 짱짱했으면 좋겠고, 손목에 시보리는 없었으면 좋겠고, 바지 길이는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조목조목 원하는 바를 말해주시면 좋겠다. 다음엔 아주 딱 원하는 스타일로 100벌 만들어 드릴라니까.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나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바느질러#워킹맘#워킹맘부캐#실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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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만드는 삶을 지향합니다. https://brunch.co.kr/@sword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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