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에 학도병 자원입대 현역 중 마지막 6·25참전용사
하나회 척결 김영삼 대통령 전역 하루 전 장군 진급시켜
42년 8개월 최장복무기록… "정치군인시대, 참군인 표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18세 나이로 학도병에 자원입대했다. 1.4후퇴 이후 강원도 금화·화천지구 전투에 참전해 주요 고지 확보, 적군 사살·생포 등 큰 공훈을 세웠다.
1993년 정년으로 군문(軍門)을 나설 때는 ▲현역 가운데 마지막 6.25참전용사 ▲42년 8개월 최장복무 ▲전역 하루 전 장군 진급 등 여러 기록이 언론에서 화제를 모았다.
군인을 천직으로 여긴 고 정육진(1933~1994) 준장이다.
정부는 1955년 1월 15일 대통령명으로 당시 소위였던 그에게 '화랑무공훈장'을 결정했지만, 전란으로 혼란한 시기여서 수여증을 작성할 때 군번을 잘못 기입해 전달하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
68년이 흐른 올해 2월 14일, 최재구 예산군수가 고 정육진 준장의 배우자 김영옥(89)씨와 장녀 정해경(65)씨에게 훈장을 전수했다. 2019년 '6.25전쟁 무공훈장 수여 등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면서 조사단을 구성해 6.25전쟁 병적자료 전수조사, 주민등록·제적정보시스템 대조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정 장군은 전역을 몇 년 앞두고 군대동료 소개로 충남 예산군 덕산면 둔지미(둔1리)에 땅을 구입해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낼 집을 지었지만, 안타깝게도 전역한 뒤 간암으로 투병하다가 이듬해 1월 17일 홍성의료원에서 향년 61세로 영면에 들어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자택에선 해경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전역한 뒤 덕산 둔지미로
정 장군은 육군3사관학교 일반학처장(대령)으로 정년을 준비하던 중 전역 하루 전 김영삼 대통령이 준장으로 진급시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전역식 준비로 서울로 옷을 맞추러 올라가는데, 라디오뉴스로 1계급 특진소식을 들었다"는 김영옥씨의 증언처럼 전격적으로 이뤄진 일이다. 김 대통령은 1993년 8월 30일 그를 청와대로 초청해 직접 준장계급장을 달아주고 삼정도(현 삼정검)를 수여했다. 해경씨는 "김영삼정부가 출범한 뒤 군대내 육사출신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는 동시에 묵묵히 군인본분에 충실한 사례를 발굴하고 있었다"며 "'참 군인의 표상'으로 아버님을 선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정 장군이 군인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1951년 서울 한성중학교 5학년(18세)에 재학할 때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해 일주일 동안 훈련을 받으면서다. 그는 계급장 없이 최전방 소초병으로 참전해 사선을 넘나들었다.
휴전협상을 시작할 무렵 땅 한 평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치열한 상황에서 김일성고지에 투입됐을 때 일이다. 혈전 끝에 겨우 고지를 점령했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도로가 유실돼 차량보급이 끊기자 탄약상자를 등에 지고 밤새 행군해 새벽에 고지에 도달했다. 너무 힘들고 피곤해 털썩 주저앉아 탄약통을 내려놓는데, 바로 발아래 참호 속에서 한 중대장이 올라왔다.
보급이 끊긴 극도의 불안감과 절망 속에서 창백한 얼굴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수염이 더부룩한 중대장은 오히려 늠름한데다 섬광이 번득이는 눈빛과 걸걸한 목소리로 "여기까지 오느라고 참 고생 많았다. 자! 이제는 우리가 승리했다!"며 손을 잡아줬다. 그때 온몸에 전기가 흐르며 힘이 충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강렬한 지휘관상에 감동받은 학도병 정육진은 그처럼 훌륭한 장교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는 모두 소위 임관을 꺼려했다고 한다. 오합지졸 병사들을 데리고 직접 전투에 나서야 했고, 승리를 장담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총알받이라는 인식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준장은 1953년 4월 6일 갑종간부후보생 57기로 보병학교에 입교한 뒤 소위로 임관했다.
휴전 이후에는 두 차례 월남전에 파병됐다. 1965년 10월 맹호부대 공보장교로 월남전에 참전해 한국군 대민선무작전 등을 전세계에 알리며 주월 외신기자들에게 유창한 영어실력을 각인시켰다. 당시 <런던타임즈> 1면에 한국군의 대민신뢰를 높이 평가한 '고보이 전투의 교훈'이라는 기사가 보도되도록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6월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으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1972년 두 번째 파병 때는 한국군이 1974년 철수할 때까지 중령으로 주월 한국군사령부 대변인을 수행했다. 해경씨는 "아버지가 군대에서 정훈병과를 갈 수 있었던 것도, 파월사령부에서 대변인 임무를 맡게 된 것도 영어를 잘해서다"라며 "원어민 발음을 익히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영어교리반을 다니기도 했고, 거의 독학으로 <타임>을 볼 정도로 영어실력을 쌓았다"고 기억했다.
예산서 마을학교 운영 소망... 장녀 해경씨가 유훈 이어
김영옥씨가 기억하는 남편은 자상했으며, 술·담배는 멀리했다. 허튼소리 하는 법 없이 책을 좋아하는 교육적인 사람, 이른바 '학자' 타입이었다. "사변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해 배움에 대한 갈증이 커" 결혼 후 주경야독으로 단국대학교 법대를 다니고, 경북대학교대학원 국민윤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명령에 따라 임지를 옮기면서 38년 결혼생활 가운데 같이 산 기간은 12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할 틈이 없었다"고 한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기간이 길어 자녀들과의 소통, 교감, 교육에 소홀했을 거라 여기기 쉽지만, 해경씨는 "저와 동생들(해찬·해동, 2살 터울)은 비록 물리적으로 아버지와 떨어져 지냈어도, 장문의 편지로, 육성 녹음테이프로, 아버지가 없는 기간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합격한 기념으로 받은 만년필 등으로 유대감은 오히려 더 깊었다"고 말했다.
또 "짧은 시간이나마 같이 지내는 동안 저희 손목을 꼭 잡고 동네 산보를 자주 다니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셨다. 여름에는 집 옥상에 돗자리 펴고 다 같이 모여 노래를 부르게 했다. 방학 때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전방에서 지내곤 했는데, 지프차를 운전하며 '돌아오라 소렌토', '고향초'를 부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화를 많이 했다. '세상에 살면서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무 물질을 추구하지 말라'는 말씀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정 장군은 퇴근 후 시간은 주로 자녀들과 함께 공부하며 보냈다. 김 여사는 "남편이 '아이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수학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영어를 공부할 시간이 없다. 영어는 중학교 1학년 때 3학년 과정을 다 떼야 한다'며 영어를 가르쳤다. 교재도 직접 골라줬다"고 전했다. 이 같은 사랑과 보살핌으로 첫째·둘째는 서울대학교, 막내는 건국대학교에 보란 듯이 합격했다.
해경씨는 "아버지께서 전역 후 예산에서 마을학교를 운영하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싶어 하셨다"라며 일찍 세상과 이별한 선친에 대한 애뜻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지역에서 생협이사장을 맡아 수행했던 다양한 동아리·마을모임 활동과 올해 시량초등학교와 덕산유치원에서 시작하는 동화구연활동을 하는 자신을 향해 "어쩌면 아버지의 유훈을 제가 이어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 장군은 월남전 참전 이래 사단, 군단, 육군본부, 국방부를 거쳐 1977년 10월 육군3사관학교로 전입해 전역 때까지 줄곧 초급장교 양성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강의를 듣고 임관한 장교만 7만여 명에 달한다. 훈장이 5개(보국훈장2, 무공훈장 3개), 대통령·국방부장관·참모총장 표창 등이 20개가 넘는다. 세상이 일곱 번 변할 68년만에 유가족 품으로 돌아온 '화랑무공훈장'이 그에게도 전해질 수 있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