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이 있다. 누구는 최소 수십만 명이라고 하고 누구는 족히 백만 명은 될 거라고 말한다. 반세기가 넘게 이들이 존재는 역사에서 지워졌다. 뒤늦게 피해자들이 통곡하며 가슴속에 켜켜이 숨겨왔던 통한의 덩어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피해자 개개인의 사연을 묻고 들어주는 이는 더 드물었다. 박만순(충북역사문화연대, 사단법인 함께사는우리 대표)은 유가족의 아픔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그는 처음에 충북지역에서 유가족들을 만났다. 16년 동안 충북지역 2000여 곳 마을에서 6000여 명의 유가족과 목격자를 만나 그들의 증언을 듣고, 묻고, 기록했다. 그 결과물은 박만순의 <기억전쟁>으로 처음 출간됐다.
다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대전 골령골 유가족과 만났다. 대전·충남은 물론 제주와 여수 등 피해자가 있는 곳이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50여 명을 찾아 다니며 대전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의 실상을 기록한 <골령골의 기억 전쟁>이 출간되자 당시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은 "응어리진 가슴속 한을 풀어 헤쳤다"고 반겼다. 피해자의 기억은 물론 감정까지 살려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다음 발걸음은 경상도와 전남 지역으로 향했다. 경북 경주 지역의 민보단 청년들의 악행, 전남 해남 지역의 바다와 갈매기섬에서 자행된 학살 실태, 전차 상륙함까지 동원해 1681명의 민간인을 괭이 바다에 수장시킨 사건, 인민군 복장으로 가장한 전남 나주 경찰의 '기획 학살', 득량만 바다에 수장시킨 전남 장흥 지역의 사례, 전남 완도 지역의 학살 사례가 <박만순의 기억전쟁 1>을 통해 재조명됐다.
<박만순의 기억 전쟁 2>에서는 충남 홍성군과 태안군,아산시,경산 코발트 광산, 인천 월미도, 경기도 김포시와 여주군의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 등 민간인 학살 사례를 철저히 답사하고 인터뷰했다.
그가 이번에는 <박만순의 기억 전쟁 3>(고두미)을 펴냈다. 다섯 번째 결실이다. 이번에 그가 찾아간 곳은 전북 임실과 완주, 전남 함평과 영광, 경북 대구와 영덕, 경남 거창, 충북 영동, 충남 일부 지역이다.
'오소리 작전'으로 불리는 임실 지역 민간인학살사건에서는 경찰의 강요로 폐금광에 숨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생솔가지에 불을 지핀 아내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그 결과 수백 명이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700여 명의 주민들을 향해 총알을 퍼부은 토벌대와 토벌대 중대장의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일어나라, 모두 살려주겠다'는 말에 일어선 주민들에게 두 번, 세 번 거짓말을 해 몰살시킨 전남 함평군 월야면 월야리 학살사건. 여성과, 아기, 어린이 등을 무참히 학살하고 '공비 1005명을 사살했다'고 허위 보고한 영광군 불갑산 학살사건, 해방 직후 발생한 대구 10월 항쟁 (쌀 봉기), 사라진 '산간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경남 거창, 경북 영덕, 전북 완주), 충북 영동군 주민들의 '스러진 꿈'으로 이어진다.
특히 그는 이번 글에서 억울한 죽음에 좌우가 없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남로당원에 저격당한 대동청년단 충북도단부 부단장 서병두, 지방 좌익들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해남군 현산면 월송리, 지방 좌익에 학살당한 전남 완도군과 전북 완주군, 충북 영동군 등을 오간다.
문학평론가 선안나씨(동화 '잠들지 못하는 뼈' 저자)는 추천사에서 "박만순의 저서는 이념과 전쟁이라는 광풍이 평범한 개인들의 삶을 어떻게 유린하며, 인간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악할 수 있는지를 서늘하게 경고한다"라며 "어떤 역사 교과서보다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책이기에 진심을 담아 추천한다"고 썼다.
노영석 부경대 교수(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유해 발굴 담당)는 "박만순의 글은 당시 민중들이 겪었던 아픔과 절망에 대해 감성을 곁들여 기술하고, 훗날 한국전쟁 당시의 망탈리테(심성)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업적"이라고 평했다.
저자 박만순은 글 머리에 "21년 동안 민간인학살진상규명을 위해 달려오며 보편권 인권과 평화의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기억 전쟁'은 역사 전쟁이며 망각을 강요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할 전쟁"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