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 한일관계는 한일회담이 타결돼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진 이후, 더욱 '반공'으로 다져져 여러 가지 갈등을 수면 아래 잠재우고 경제를 우선으로 결속했다. 지난 3월에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는 한미일 공조 속에 한일협력을 강조했다.
이는 신냉전기에 돌입했다는 시의성에 더해,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정세의 변화가 우리 앞날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면서, 불안을 씻으려한 의도가 엿보인다. 오랫동안 한일연대의 배경에는 반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조슈(長州, 현 야마구치현)에 주목하면서, 반공에 의한 한일연대의 한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기시 노부스케의 한국관
야마구치 출신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67)에 주목하는 이유는 2차대전 말기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농상무성대신을 지냈고, 전후, 극동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로 3년 반 투옥됐는데, 한국전쟁과 냉전의 영향으로 석방돼 일본의 고도경제성장 초기인 1957~1960년 총리를 지냈고, 전후 일본의 정치경제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기시는 총리가 되기 전, 1956년 이시바시(石橋) 내각에서 부수상 겸 외상으로 입각해 외교소신을 표명했다. 이듬해, 기시는 총리로 취임한 후 일본의 외교3원칙에 소신을 반영시켰다. 첫째 국제연합중심주의, 둘째 자유주의 국가와의 협조, 셋째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을 발표했다.
일본외교사를 되돌아볼 때, 외교3원칙은 서로 모순되기도 하지만, 균형을 갖고, 일본 외교의 중요한 원칙으로 설정됐다. 먼저 국제연합의 명명에는 일본과 독일 나치에 대한 연합국의 단결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어 일본과는 불편한 관게로 시작하지만, 전후 오히려 국제연합을 일본 외교의 중심에 두면서 받아들이려 했다.
자유주의 국가와의 협조는 서구,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강조하는데, 수출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정치·군사적으로는 미일동맹으로 뒷받침해 왔다. 기시는 미일동맹을 대등한 동맹으로 개선하기 위해, 미국에 반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안보상의 이유로 대미의존의 자세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일본이나 한국이 반공을 강조해온 것은 미국이라는 뒷배가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57년 당시 기시 총리는 아직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동남아시아 각국을 방문하면서, 배상교섭을 통해 경제에 역점을 둬 화해를 이끌어 내려고 했다. 동남아시아를 방문한 다음, 미국을 방문하는데, 오늘날 미중대결 속에서 일본의 외교를 전개하는 듯한 중국을 포위하는 반공외교가 전개되고 있었다. 가까운 이웃나라 중국과 한국과는 아직 거리감이 있던 시기였다. 수상으로 취임 후 일본을 방문한 한국 외무부 김동조 차관에게 다음과 같이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다.
"막부시대부터 조슈의 하기(萩)항은 조선과 많은 무역 거래를 했고, 그 때문에 조슈에는 많은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나 또한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보다(久保田) 발언 파문'(일본의 조선 통치를 미화)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됐던 시기, 기시는 총리로 취임 후 한국과의 관계회복에는 험한 길을 있을 것이라 예상하면서 국교정상화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기시 노부스케와 통일교회
기시 노부스케와 구통일교회(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와의 관계는 3대에 걸쳐 이어져 왔는데, 아베 전 총리의 피살로 그 관계에 의문을 갖게 된다.
기시와 구통일교회와의 밀월관게는 반공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이념적인 공통분모를 모색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통일교회는 1964년에 일본에서 종교법인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기시의 바로 옆집에 본부를 뒀다.
1968년에 교단계의 국제승공연합이 설립됐다. 명예회장은 만주인맥으로 기시와 가까운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명예회장으로 취임했다. 기시는 1973년 통일교회를 방문해, 사사가와가 교단의 활동에 공명하고 있다는 소감을 발표하면서 지원했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한일 간 연대의 단초에는, 1960년대 군부 쿠데타 후 일본을 방문한 국가재건회의 의장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만남이 있었다.
1961년 11월 수상 관저에서 만찬을 한 다음날, 기시가 주최한 오찬에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발언을 했다.
'경험도 없는 우리는 단지 맨손으로 조국을 건설하려고 하는 의욕만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젊은 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 분들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 나라를 가난에서 탈출시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가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공업화와 근대화를 위해서는 일본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솔직한 표현이었지만, 메이지 유신뿐만 아니라, 그 후 조선침략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한 조슈(長州)출신 무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발언이었다. 일본 측은 이를 조선식민지 지배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합법성을 두고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계제(階梯)를 마련했다.
실은 박정희는 기시와의 대면 이전에도 서신을 통해, 국교정상화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을 한다. 그 후 1970년 기시는 박정희 정부로부터 1등수교훈장을 받게 된다.
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신조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의 외조부다. 기시와 아베 가계도에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등 일본의 거물 정치인들이 다수 포진돼 있다.
아베 전 총리의 외교행보엔 기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기시는 동남아아시아와 함께 인도를 방문하며 중시했는데, 아베도 이를 이어받아 아시아 외교에서 인도태평양 외교를 강조했다. 미국을 의식하며 중국 포위망 외교에서 선봉을 잡는 공격적인 외교를 의미한다. 여기서도 자유와 반공은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베 전 총리의 친동생으로 기시가로 입양된 기시 노부오(岸信夫, 전방위상)가 있다. 병 때문에 지역구(山口2)를 자식에게 물려주어, 4월 23일 보선을 앞두고 있다. 후지TV출신인 31세 기시 노부치요(岸信千代)인데, 2월에 열린 후원회에는 기시다 수상을 비롯한 유력정치가들이 모여 지원했다. 후원회에서 기시 노부치요는 증조부인 기시 노부오와 백부인 아베 신조의 정치를 이어받겠다고 다짐하는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