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에게 이벤트로 적금 선물을 했었다. 상대방이 수락하지 않아 결국 내게 다시 돌아왔다. 나중에 조카에게 물으니 적금이 뭔지 몰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적금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한다. 난감했다. 적금을 모르는 사람도 있구나, 한편으론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적금 만기 기쁨을 누리는 날은 그렇게 날아갔다.
늦은 오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A은행이다. 적금 만기가 되었으니 직접 방문해 달라는 안내 전화다. 전화 온 김에 간단한 상담을 했다. 재예탁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상품 문의를 했다. 담당자는 때마침 특판 금리가 나왔다며 안내를 했고 자신을 찾으면 대기줄 없이 바로 상담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단도직입 물었다. "만약 담당자님이면 그 돈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 마음으로 상담해 주세요"라고 하자 펀드를 안내하던 담당자는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곧 "아, 네 저라면 안전한 예탁으로 할 거예요. 아무래도 2금융권이 금리가 조금 더 높죠"라고 진솔한 답변을 했다.
A은행은 오래전 학자금 저리 대출을 시행했던 은행이다. 정책 중 하나였을 뿐인데 나는 그게 고마워 가능한 이 은행을 이용했다. 재형저축, ISA, 청약저축처럼 전 금융 동일 상품이 출시될 때, 이왕이면 이 은행에 가입했다. 수백만 고객 중의 한 명뿐인 나를 그 은행은 기억 못 하겠지만 내 마음속 정 때문에 A은행을 찾았다. ISA라는 금융상품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창구 직원은 처음 보는 나에게 대뜸 ISA를 가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만 원만 입금하면 된다고 사정했다. 실적 때문이었던 거 같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렇게 해줬다. 재형저축('근로자 재산형성저축'의 약자. 근로자의 재산형성 돕겠다는 취지에서 2013년부터 출시된 비과세 상품)도 그렇게 가입했다.
이율 크게 다르지 않은데.. 10년 만기를 유지한 까닭
10년 재형저축이 만기 되었다. 2013년 4월 5일 시작해, 당초 7년 만기로 설계되었으나 3년 연장제 선택으로 10년 만기가 되었다. 순수 비과세. 작년 6%대 고금리 상품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재형저축을 해지했다. 6개월 만기를 앞둔 시점이었음에도 그게 더 이익이라는 분석이었다. 정확한 분석이다. 중도해지 이율과 만기 이율이 별 차이 없는 저축이었고 결과적으로도 그랬다. 현재 4% 금리를 감안하면 중도해지가 훨씬 이익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재형저축만큼은 해지하지 않았다. 2%대 금리였음에도 10년 만기를 꽉 채웠다. 이익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신념 때문이었다. 목표지점에 골인하는 것과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끝까지 완주하지 못한 후회, 미련 따위의 것들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맥락 없이 그게 재테크와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가끔은 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 있으니까.
10년. 길다면 긴 시간이다. 한 직장도 그렇게 오래 다니질 않았으니까. 그만큼 빠른 포기를 했다. 인내도 없었다. 등산할 때도 힘들면 안 가겠다고 버텨 정상을 안 밟고 하산했다. 둘레길도 불과 몇 킬로 남겨두고 포기했다. 무언가 배울 때도 한 달 지나면 중도 포기했다. 골프, 스키, 복싱, 바이올린 등 다 해봤지만 제대로 한 게 없다. 의욕은 넘쳤지만 흥미를 빨리 잃었다. 작심삼일은 내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런 내가 고금리 유혹에도 곁눈질 안 하며 뚝심 있게 10년 만기를 채운 이유는 바로 뿌듯함 때문이었다. 한 송이 뿌듯함을 피우기 위해 나는 그렇게 10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끝까지 해냈다는 성취감에 마음은 1년 전부터 들떠 있었다. 모두 고금리오픈런으로 갈아탈 때 나만 아니 오를 외친 것도 그런 이유다. 재형저축은 그만큼 특별한 보석상자 같았다. 무엇보다 10년을 같이한 동반자였다.
10년 전, 처음 가입했을 때 의욕이 넘쳤다. 늘 그렇듯이.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져 꾸준히 하지 않았다. 찔끔찔끔했다. 일 년은 정말 쉬었다. 해지하기는 아까워 분기를 간간히 채웠고, 3년이 넘은 시점에서 열심히 저축하기 시작했다. 재형저축만큼 좋은 게 없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수입이 없을 때는 쉬었다가 다시 채우기를 반복했다. 다른 예탁이 만기 되면 재형저축으로 몰아주기도 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벽돌을 쌓는 마음. 더디지만 그렇게 완성된 10년의 세월이다. 그리고! 목표금액을 채웠다.
그런 재형저축을 중도 해지한다는 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생명을 향해 '너를 위해 서야'라며 강제로 산소호흡기를 떼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남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내겐 그런 것이었다. 사물에게도 정을 느끼는 성향 때문인데, 상대가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 정성을 다한다. 저리대출을 해준 은행에. 그 은행 직원이 권한 재형저축에. 그리고 그 시간에.
정들었던 시간과 이별하는 기분을 느낀다
이른 아침. 창구에 앉아 만기 예탁금을 찾으면서, 통장을 폐기하는데 마음이 묘했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직장과 이별하는 기분.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잡을 수 없고 떠나야 하는 마음처럼 서로를 받아들였다. 담당자가 다시 묻는다.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아니오, 라고 답했다.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었음에도 정말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그럼에도 계획한다면 그 돈은 다시 미래의 10년을 향해 쓰일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10년 저축을 계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재형저축의 시간은 떠났다. 10년 동안 꿈꾸며 설레었던 재형저축 만기의 기쁨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중도해지 안 하고 끝까지 완주했다. 그 시간적 의미가 주는 완성이 수익보다 더 중요한 이유다.
내 생애 첫 재형저축 10년 만기해지하는 날 봄비가 내렸다. 가뭄을 해결하는 단비. 내 삶의 단비처럼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적셔준 촉촉한 하루. 2023년 4월 5일 10년 재형저축 만기해지날.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있었지만, 뿌듯함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앞으로 어떤 무엇의 시작도 결말은 10년의 시간을 인내한 재형저축이 지표가 될 것 같다.
적금도 모르던 조카가 주식에 관심을 보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어플을 깔고 계좌 가입하는 것부터 알려줬다. 기념으로 우량 1주를 선물했다. 그리고 기념일마다 용돈을 보내면 스스로 매수하는 걸로 했다. 적금처럼. 펀드처럼. '이모, 기분이 좋을 때도 생각해줘'라는 애교는 덤이다. 기다림과 깨달음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조카도 기쁨을 만끽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오늘 내가 느낀 이 '뿌듯함과 지표'를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