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당시 나의 아버지는 교사였다. 고향인 경북 구미의 당신 모교였던 구미초등학교에 재직했다. 그해 내가 태어나고 그 이듬해인 1946년 10월 1일, 경북 대구 지방에 이른바, 10.1 항쟁(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아버지는 민족주의자로 그 사건에 연루돼 교단을 떠나셨다.
1979년 10.26 사건 뒤 신군부가 등장했다. 그때(1981년 초) 아버지는 당국에 연행돼 국가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2년간 대구 화원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그런저런 아버지 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1946년에는 선산경찰서 유치장 밖, 1981년에는 대구화원 교도소 밖, 가족들의 고초는 혹독했다.
그 모든 걸 묻어두고 지내는 가운데 얼마 전 딸이 할아버지의 억울함을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정한 모양이다. 얼마 전, 조사관은 아들인 나에게 면담을 요청하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소지하고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침 내일이 약속한 날이라 집안에 자료를 뒤지자 마땅한 게 나오지 않았다.
1980년도 사건만 하더라도 이미 40여 년이 지난 뒤인지, 당사자인 아버지도, 그때 대담을 나누던 가까웠던 친구들도 대부분 세상을 뜨셨다. 공소장과 판결문은 이미 딸아이가 제출했기에 특별히 새로운 증거물이 없었다.
침묵하고자 그림을 그리시다
그런데 아버지가 교도소 출소 후, 자주 그리시던 '달마상', '대춘록보(待春鹿譜)', '설중마부(雪中馬夫)' 그림들 가운데 두 점이 있기에 이를 가지고 가고자 복사를 했다. 그림에 문외한이었던 아버지가 교도소 출소 후 말을 하지 않고자 이들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내셨다.
언제가 깊은 밤, 나에게 은밀히 말씀하셨다. 봄을 기다리는 '사슴'과 눈보라 치는 들판의 '마부'는 아버지 당신이라고.
그때 얼마나 고문이 심하셨느냐 묻자 "조사실 난로를 뒤집어쓰고 싶었다"는 말씀만 했다. 출소 후 가족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자 입을 닫고 그림을 그리시며 사셨다.
나는 몇 차례 아버지의 인생 역정을 장편소설로 쓰고 싶었지만 여태 쓰지 못했다. 아마도 끝내 탈고치 못할 것 같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과 벌거벗을 수 있는 용기도 없을뿐더러, 나도 자식으로 아버지를 많이 아프게 해드렸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아버지의 유작 두 점을 챙기면서 "살아남은 나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곧 아버지 영전에 찾아가서 무릎 꿇고 깊이 참회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