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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 시민기자들이 일상 속에서 도전하고, 질문하고, 경험하는 일을 나눕니다.[편집자말]
때는 바야흐로 지난 3월 학부모회 총회가 있던 날이었다. 마지막 순서였던 '담임과의 시간'에 나는 선생님이 준비하신 동영상을 보았다. 사진을 영상으로 편집한 것이었는데 평소 교실에서 지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천천히 지나가는 여러 장의 사진들 중에 유독 한 장면이 눈에 띄었다. 쉬는 시간에 다른 아이들은 삼삼오오 어울려 놀고 있는데 우리 딸은 책상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회성이 부족해 보이는 아이

그날 나는 하루 종일 그 사진 한 장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우리 아이가 입학한 이후로 교실에서 혼자 놀았던 건 아닐까, 말 못할 외로움을 속으로 삼키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흑백처럼 극명하게 대비되었던 주변 친구들의 밝고 명랑한 표정들이 내 마음을 조금 더 슬프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딸은 한창 사회성이 발달할 시기인 5세부터 코로나를 겪었다. 다니던 어린이집도 차량운행을 완전히 멈춰서 나는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집에서만 보내야 했다. 원래부터 가정보육 중이던 둘째도 돌보며 심지어 셋째까지 임신했던 나는 첫째에게 내밀 손이 많이 부족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해 말 우리는 갑작스럽게 이사를 했다. 새롭게 옮긴 유치원에서 아이의 부족한 사회성은 더 두드러졌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4개월을 겉돌았다. 게다가 선생님의 조력도 은근한 편이어서 아이가 외로운 시간을 꾸역꾸역 홀로 삼켜내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첫째의 교우관계를 비롯한 사회성에 대한 걱정이 더 커졌다.

그래서 내가 아이의 교실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사진을 보고 나서 하교한 아이를 만나자마자 묻고 싶은 질문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아이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마음이었지만 막상 친구에 대한 질문을 필터링 없이 입 밖으로 마구 꺼내기엔 조심스러웠다. 아이와 나의 관계가, 그리고 아이의 작은 마음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결국 학교에서의 교우관계에 대해 고작 몇 마디 이야기만 겨우 꺼냈다.

이런 내 걱정과 답답한 마음을 남편과도 이야기해 보았지만 뾰족한 답을 찾을 순 없었다. 이런 시간이 이어지다보니 이제는 엄마인 내가 이 상황을 개선할 만한 정답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보통의 엄마들이 하는 고민처럼 나라도 나서서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 줘야하나 싶기도 했고, 또래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원이라도 하나 더 보내야 하나 생각해봤다.
 
 책 한 권 덕에 나와 아이의 관계가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했다.
책 한 권 덕에 나와 아이의 관계가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했다. ⓒ elements.envato
 
그러던 어느 날 한 모임에서 이 고민을 조심스레 토로했다. 고민을 들은 지인 한 분은 관련 그림책을 보며 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다음 날 바로 도서관을 찾았다. 그날 빌린 책 중 한 권은 <어린이를 위한 마음 처방> 친구편이다. 제목도 목차도 그림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집에 가자마자 아이의 잠자리 독서 보너스 책으로 이걸 쓰윽 내밀었다.

사흘에 걸쳐 책을 쪼개고 쪼개어 천천히 조금씩 함께 읽어갔다. 책에는 내가 막연히 친구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던 내용 그 이상의 것들이 그림과 글로 아주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그림책은 대화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었다.

어떤 페이지를 읽다가 나는 아이에게 친구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런데 딸은 되려 "엄마는 친구한테 상처 준 적 있어요?"라는 질문을 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조금 고민한 뒤 지난날의 내 잘못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엄마인 나의 잘못을 말한다는 게 부끄럽긴 했지만 오히려 딸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관계에 있어 여전히 불완전한 나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거절을 당할까 싶어 친구에게 다가가는 게 어렵다는 아이의 서툰 모습이 더 잘 이해되었다. 나 또한 여전히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때때로 어렵기 때문이다.

스스로 방법을 생각한 아이
 
아이와 함께 읽은 그림책 딸과 함께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나눌 수 있었던 책이다.
아이와 함께 읽은 그림책딸과 함께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나눌 수 있었던 책이다. ⓒ 박여울
 
나에게만 이 그림책이 유익했던 건 아니다. 아이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주인공의 다양한 표정과 상황, 나누는 대화 등을 통해 막연히 알고 있던 친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가고 있었다. 친구를 사귀는 방법이 나와 있는 페이지를 읽어주니 아이는 갑자기,

"OO이가 복주머니를 엄청 잘 접어요. 나도 그거 잘 접고 싶으니까 내일은 OO이한테 복주머니 접는 법을 좀 알려달라고 말해봐야겠어요."

적잖이 놀랐다. 그동안 학교생활에 대해 몇 번을 물어도 그저 아이는 겉도는 대답만 했을 뿐 친구의 이름이나 특징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자 자신감이 샘솟았는지 친구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고민했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낸 것이다.

그날 밤 다른 모든 가족이 잠든 사이 나와 딸 둘은 나란히 누워 학교생활과 친구에 대해 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더 이야기를 하고 잠들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궁금했지만 듣지 못한 학교에서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내가 더이상 묻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서 술술 이야기해 주었다.

아마 그림책이 아니었다면 아이와 나는 이런 대화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학교생활에 대한 단편적인 질문과 답변만 주고 받고, 나의 짧은 당부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이를 위한다고 시작했던 대화가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정혜신 작가의 <당신이 옳다>에는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돌아보면 나는 딸에게 만큼은 너무나 바른 말을 많이 했다.

그림책 없이 아이와 함께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바른 말만 하다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책 한 권 덕에 나와 아이의 관계가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했다. 친구 사귀기를 어려워 하는 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엄마 역할을 했다.

다음 날 아이는 잊지 않고 친구에게 용기를 내어 색종이를 같이 접자고 제안했단다. 결과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아이가 용기를 내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 아이를 긍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다가가는 그 용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아마 그림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와 브런치에 실릴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마음 처방 : 친구 편

펠리시티 브룩스 (지은이), 마르 페레로 (그림), 송지혜 (옮긴이), 어스본코리아(2023)


부산 지역 시민기자들이 일상 속에서 도전하고, 질문하고, 경험하는 일을 나눕니다.
#그림책#책육아#초등1학년#친구#교우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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