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를 따라 붉은빛과 분홍빛의 영산홍이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줄줄이 늘어선 이팝나무는 소복소복 꽃들을 달고 복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차창 너머엔 손을 내밀면 닿을 듯이 초록이 지천이다.
초록이라 부르지만 초록은 많은 색을 품고 있다. 노란빛이 살짝 도는 풀빛도 보이고 돋아나는 새잎들의 연둣빛도 곱다. 연두는 아가의 손처럼 곱고 여린 느낌이다.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연두의 눈짓과 한껏 무르익은 초록 잎사귀들이 어우러져 다양한 초록의 향연을 보는 듯하다.
봄 경치를 벗 삼아 남편의 팔촌 형제 모임에 가는 길이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밀양이 멀게만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오늘 이 길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창밖의 다채로운 풍경 때문만은 아니리라.
해마다 4월 말이나 5월 초면 남편의 팔촌 형제모임을 한다. 코로나로 지난 3년 동안은 만나지 못했다. 23년 전 시작할 때만 해도 누님들 몇 분도 참석하시고 부부 동반으로 오시는 분도 꽤 있어 인원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수가 점차 줄어들어 이즈막에는 열서너 명 정도가 고정적으로 나온다. 나는 중간에 서너 번 빠진 적이 있지만 총무를 맡고 있는 남편은 매번 참석한다. 모임 구성원 중 막내라 총무 자리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다.
주위 사람들에게 팔촌모임에 간다고 하면 아직도 그런 게 있냐며 눈이 동그래진다. 팔촌이면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하긴 멀리 있는 사촌도 자주 만나지 못하면 남보다 못한 사이긴 하다.
팔촌은 고조할아버지의 자손이다. 요즘 평균 수명이 길어져 아가들이 왕할머니라고 부르는 증조할머니가 살아계신 집안도 많다. 집안 행사에 4대가 모인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4대손끼리 육촌이니 따지고 보면 팔촌이 그리 멀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의 팔촌이나 남편의 팔촌은 민법상 친족에 속하며 팔촌 내의 혼인을 금지하고 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또 가까운 사이기도 하다.
어릴 때 이사 간 마을은 40여 가구가 사는, 나와 같은 도씨 집성촌이었다. 대부분 친척이었고 타성은 5가구 정도였다. 육 남매 중 막내인 아버지는 항렬이 높았고 마을 사람들은 종종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아버지는 본인보다 나이 많고 머리가 허연 사람을 가리키며 중학생인 내게 육촌이나 팔촌 오빠라고 소개했다.
어릴 때는 촌수 관계를 이해하기 힘들어 곤욕스러웠다. 아버지에 이어 나까지 항렬이 높았던 연유로 나는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 연배의 어른에게 아지매라고 불렸고 누군가의 먼 친척 할머니였다. 지금도 고향 마을에는 내게 아지매나 할매라고 부르는 가깝고 먼 친척들이 살고 있다.
친형제 자매도 일 년에 몇 번 얼굴 보기 힘든 세상에 뭔 팔촌모임이냐고 생각하진 않았다. 친정의 영향으로 팔촌이 멀게 느껴지진 않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왠지 남편의 팔촌모임에는 가기 싫었다. 모임에서 막내다 보니 손윗 동서들과 나이차가 많다. 적게는 열 살. 많게는 스무 살 가까이.
나이가 많은 시댁 친척은 삼십대 초반의 내겐 어렵기만 했다. 도착하자마자 언제 끝마칠지 몇 번이고 시계만 쳐다봤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항상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함께한 추억도 없고 일상을 공유하지도 않았다.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고 나면 공통된 대화거리가 없어 베슥베슥 겉돌기만 했다.
아들이 어릴 적엔 아이가 갑갑해한다는 핑계로 아이 손잡고 주위를 배회하고 다녔다. 핑계만 있으면 안 가고 싶었다. 십여 년쯤 지나자 나이 값을 하는지 좀 달라졌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하던 시간들이 견딜 만해졌고 형님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맞장구도 치게 되었다. 때마침 모임의 분위기도 전과 달라지고 인원수도 줄어들었다. 활기차고 화기애애하던 모임도 세월 앞에서는 장사 없는지 다들 건강 챙기시느라 음주가무도 멀리 한다.
밀양의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방앗간으로 갔다. 형님(손위 동서)들이 가끔 들르는 곳으로 이곳의 참기름과 통깨는 품질이 좋다. 식사 장소가 밀양의 Y식당으로 정해지면 형님들은 아예 방앗간에 들를 작정을 하고 온다. 형님들은 자식들에게 나눠 줄 요량으로 참기름을 넉넉하게 구입하고 손주들에게 식혜를 해 준다며 엿기름도 샀다. 나도 참기름 2병, 들기름 1병과 볶은 통깨를 샀다. 한동안 아낌없이 고소한 맛을 풍길 수 있겠다.
다음 행선지는 창녕 남지의 유채꽃밭이다. 33만 평의 드넓은 곳에 노란 유채꽃이 펼쳐져 있었다. 전국에서 단일 면적 최대 규모라고 한다. 축제는 전날 끝났지만 주말이라 구경 온 사람들이 많았고 먹거리 장터가 있어 축제의 흥겨움도 남아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유채꽃밭은 낙동강의 절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내 맘속에 저장만 하고 오기엔 아까운 풍경들을 열심히 휴대폰에 담았다. 위쪽으로 한참 걸어가면 형형색색의 튤립 꽃밭이 나온다는데 아쉽게도 그곳까지 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모두들 오랜만의 나들이에 눈 호강도 하고 정자에 앉아 도란도란 삼 년 묵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니 하루가 금방 지났다.
어렵게만 생각되던 시댁 친척들과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게 되었다. 나이 들어가는 그분들의 건강도 염려가 된다. 세월이 흐른 만큼 정도 쌓인 것이리라. 친목과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팔촌모임은 자칫 쓸모없거나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다.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효율성이나 가성비만 생각하면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혈족 타령일 수 있다.
젊을 적의 내가 모임의 주변인이었다면 지금은 원안에서 머무르며 그들과 함께 한다. 마지 못해 참여하여 구속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고 있었다. 만남은 정이고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 되었다.
내년 모임은 내게 특별할 것 같다. 우리 집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모셔 다과를 들기로 했다. 식사 준비는 엄두도 낼 수 없지만 다과 정도야 문제없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 머릿속엔 이미 다과상이 차려지고 있었다. 모임을 주선하시는 사촌 아주버님과 먼 길 마다하지 않고 꼬박꼬박 어려운 걸음 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기꺼이 마음을 보탤 준비가 이제야 된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