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조직 강화를 위한 당원 정비사업이었다고요? 민주당 현역 국회의원에게 당원 명단을 참고해 우호적인 당원을 포섭하라고 안내한 게 아니구요?"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북도는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다. 국회의원 총선과 지방선거에선 당내 경선이 곧 본선으로 간주된다. 이 때문에 당내 경선 6개월 전까지 권리당원 확보에 각 후보자들은 사활을 건다.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출마자들의 권리당원 모집 경쟁이 달아오르는 가운데, 지난 2월 이뤄진 민주당 당원 정비사업이 뒤늦게 도마 위에 올랐다.
올 2월 당원 정비사업, 현역의원에 총선 네비게이션 제공?
민주당은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한 조직 강화 명분으로 각 시도당과 지역위원회에 이른바 '정비 대상 당원 명부'를 제공했는데, 당원 정비 과정에서 시당과 지역위를 장악하고 있는 현역 의원과 지역위원장에게 십중팔구 흘러 들어가는 구조라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이 때문에 호남지역 정치 신인과 청년 정치인 사이에선 "중앙당이 현역 의원에게만 정답지를 공개했다" "중앙당이 현역 의원에게만 네비게이션을 제공했다"는 식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당이 앞장서 현역 의원에게만 이른바 '선거 족보'를 제공했다는 정치 신인, 청년 정치인의 주장은 <오마이뉴스>가 확보한 민주당 공문을 보면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인다.
공문에서 민주당이 정비 대상 당원으로 열거한 당원 유형은 크게 4가지다. ①당비 약정 당원 중 미납 당원 ②당비 납부 당원 중 최근 3개월 미납 당원 ③1주소지 5인 이상 등록 당원(가족 당원 혹은 위장 전입 가능성) ④제 5차 전당대회 선거인 중 휴대전화 오류 당원 등이다. 1주소지 5인 이상 등록 당원 명부는 별도 제공됐다.
광주지역 정치 신인 A씨는 "정비대상 당원 유형을 자세히 보라. 당비 약정 당원 중 미납 당원, 당비 3개월 미납 당원, 1주소지 5인 이상 등록 당원이다. 하나같이 이전 선거에서 동원됐을 가능성이 큰 당원 유형이 아니냐"고 말했다.
A씨는 "사실상 중앙당이 (현역 의원들에게) 포섭해야 할 당원 명단을 콕 집어 안내한 것과 같다. 현역들은 명단을 보고 우리 편은 연락해 당비 납부를 독려하면 되고, 우리 편이 아니면 그냥 솎아내면 끝"이라고 했다.
일부 당직자 "당원 정비 명목으로 현역의원에 명부 흘리는 구조"
호남권 민주당 시도당에 근무 중인 한 당직자 역시 "당원 정비과정에서 서약서 등을 받고 일부 당직자에게 정비 대상 당원 명부가 주어진다. 시도당과 지역위를 현역 의원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현역 의원 손에 명부가 들어가는 구조"라며 "일부 정치 신인들 주장처럼 제도 개선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원 정비는 현수막 등 홍보를 통해 당원 스스로 정보를 수정하는 기간(1월 16~27일), 지역위 정비 기간(1월 30일~2월 10일), 시도당 정비 기간(2월 11~17일)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관련 공문에는 지역위와 시도당이 이 기간 전화와 탐문 활동으로 당원 정비를 수행하면 된다고 나와 있다.
광주시당의 경우 이들 정비 대상 당원 규모는 5만6000명, 전남도당은 12만명 수준으로 알려졌다. 선거구(지역위)에 따라서 정비 대상 당원은 적게는 5800명, 많은 곳은 1만7000명 수준으로 파악됐다.
내년 총선에 나설 전남지역 청년 정치인 B씨는 "중앙당과 시도당 공문만 놓고 보면 각 지역위 별로 정비 대상 당원 규모가 1만명 안팎을 헤아린다. 불과 2주 사이 이런 오류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B씨는 "당을 위한 조직 정비가 아니라 현역의원들이 이 정보를 바탕으로 우호적인 당원을 선별해 권리당원 자격을 유지해달라고 독려하는 사업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일부 정치 신인과 청년 정치인들은 중앙당이 이런 문제점을 알고도 선거마다 '조직 강화' 라는 명분 아래 당원 정비 사업을 반복하고 있다며 당 지도부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호남은 (돈) 줘야해, 이정근파일... 지도부 위기 못느끼나"
경선이 곧 본선이라는 인식에 따라 권리당원 모집 등 경선 준비 과정에서 호남 선거판이 '돈 선거판'으로 전락하는데도 당 지도부는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며 최근 정치권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의 돈 봉투 관련 녹음 파일을 거론하는 정치 신인도 있었다.
정치 신인 C씨는 "이정근 사무부총장 녹취록을 보라. 호남은 (돈) 줘야 해. 원래 그런 곳이야라는 취지로 언급한다"라며 "현역 의원과 후보자는 물론 중앙당과 지도부 모두 선거 때만 되면 호남이 돈선거판으로 전락하는 걸 알지만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어차피 호남은 민주당이 (당선) 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C씨는 그러면서 "중앙당 하는 것만 놓고 보면, 정치 신인들이 현역 의원을 이기려면 그만큼 돈을 쓰고 이겨보라는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이병훈 민주당 광주시당위원장은 "총선을 앞두고 당조직 강화를 위해 추진된 당원 정비 사업으로 중앙당 지침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졌다"고만 밝혔다.
민주당 시당 관계자는 "올 여름까지는 수많은 권리당원이 모집돼 결과적으로 내년 총선을 앞두고 경선이 이뤄질 때 쯤이면 권리당원에 큰폭의 변화가 있게 된다"며 "당원 정비사업이 현역 의원에게 기울어진 사업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말했다.
전남도당 관계자는 "정치 신인과 청년 정치인 중심으로 당원 정비사업 관련 우려와 불만이 제기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구체적 언급은 삼갔다.
"현역에 유리한 경선, 정치인 못키워"
일부 정치인과 유권자들은 김대중 대통령 이후 호남에서 '거물 정치인'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현역 의원에 특히 유리한 민주당 경선 제도에서 찾기도 한다.
조직 관리에 이렇다 할 문제가 없다면 큰 어려움 없이 재선, 3선이 가능한 구조인데 험지 출마, 당론에 맞선 소신 발언 등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며 몸집을 불릴 정치인이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정치 신인들과 청년 정치인들은 현역에게 기울어진 경선 제도를 바로잡기 위해선 ▲경선 전 현역 국회의원 평가 결과 공개 ▲평가 결과에 따라 컷오프를 포함한 현역 의원 페널티 부여 ▲3선 의원 이상 험지 출마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