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은 어떻게든 쓰게 한다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다 되었다. 늦은 봄날 부푼 마음을 안고 시작했던 모임이 어느덧 태양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완연한 봄날의 한복판에 들어섰다.
스물세 번째 글감은 '소설'. 멤버들은 마감을 코앞에 두고 단톡방에서 너도나도 하소연을 털어놨다. 쓸 게 없다. 이번 글감 역대급이다. 역대급은 어떻게 매번 바뀌는 거냐. 마감까지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등등. 다음 글감을 정하는 멤버는 복수(!)의 글감을 준비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아쉬운 소리를 잔뜩 해서인지, 마감일이 다가오도록 글은 올라오지 않았다. 마감 하루 전까지 글을 올린 사람은 나 하나였다. 나는 피하고만 싶었던 마음을 결국 글로 옮기고 말았다.
마감은 어떻게든 쓰게 한다. 혼자였다면 쓰지 않았을 밀도 있는 글들이 잔뜩 쌓인 건 마감의 힘이었다. 돈을 받는 마감도 아니고, 그저 모임에서 정한 마감일 뿐인데도, 우리는 서로와의 약속을 지키며 어떻게든 글을 완성해 냈다. 세상 모든 책은 마감 때문에 쓰였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마감을 몇 시간 앞두고 속속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글을 올린 멤버는 어린 딸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다. 평소 남편에게 육아를 맡기고 인근 카페로 도피해 글을 쓰거나, 아이를 재운 늦은 밤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 글을 적어낸다. 이번에는 주말에 당직이 있어 사무실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어쩌면 마감을 앞두고 당직에 걸리는 게 멤버에게는 글쓰기에 더 나은 환경일지도 모르겠다.
특유의 속도감과 위트를 지닌 멤버의 글은 매력이 철철 넘친다. 한때 일상에 너무 치여 몸과 마음이 얼마나 바닥인지가 글에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다 글을 놓거나 모임을 그만 두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됐다. 그런데도 멤버는 끝까지 글을 놓지 않고 마음을 정비한 뒤 다시 자신다운 글을 적어내기 시작했다. 요즘 안정 궤도에 접어든 듯한 멤버의 모습에 마음이 한결 놓인다.
세 번째 글이 올라왔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글자수 기준은 1800자였다. 이 멤버는 글자수를 채우는 게 너무 힘들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던 멤버는 언제부턴가 필력이 탄력을 받아 어렵지 않게 2000자 가량의 글을 써낸다.
초창기에는 글 속의 사유가 다소 부족한 듯했지만, 글이 더해질수록 그만의 특별한 통찰이 곳곳에 박혀 있어 감탄을 하게 된다. 글 속에서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그런 시선을 보여줘서 감사하고, 누구보다 진심으로 모임을 사랑하고 열심히 써주는 멤버가 참 고맙다.
네 번째 글은 마감 시간을 조금 지나 업로드됐다. 가장 오랜 시간 함께 글을 쓰고 있는 멤버다. 주저하고 망설이던 첫 글과는 달리 이 멤버는 점점 손볼 곳 없이 오롯한 글을 적어내고 있다.
자신만의 안정적인 비유 표현을 갖게 됐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힘으로 글을 이끌어 간다. 글을 읽을 때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오래 고심했는지가 눈에 선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늘 겸손하고 글쓰기에 진심이며, 모임을 아끼는 멤버다.
일 년, 놀라운 시간의 힘
요즘에는 합평할 게 많지 않다. 언제부턴가 멤버들이 저마다 개성을 드러내며 안정적인 글을 써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 칼날이 무뎌진 게 아닐까 점검을 해보지만,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여러 번 읽어봐도 도무지 조언할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제는 멤버들이 완전한 동료로 느껴진다. 도와주겠다던 나의 초심은 얼마나 큰 자만이었던가. 어려운 소재를 만나면 볼멘소리를 하다가도, 자신의 글을 마감에 맞춰 척척 내놓는 멤버들을 보면서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일 년이라는 시간의 놀라운 힘을 이렇게 마주한다.
우리의 다음 글감은 '요즘'이다. 복수의 글감을 내놓겠다던 멤버는 오히려 순한(?) 소재를 던져주었다. 과연 정말 순할지는 써봐야 알겠지만, 조금은 둥글어 보이는 글감에 마음이 잠시 쉬어간다.
'왜 글을 쓰려고 하는가'로 시작한 글이 일, 여름, 이미지, 음식, 글, 집, 달팽이, MBTI, 이름, 시월, 시간, 휴식, 질문, 몸, 행복, 공부, 선택, 숫자, 날씨, 흔적, 색깔, 소설을 거쳐 요즘에 이르렀다. 스물네 번째 글감이다. 2주에 하나씩 글을 적고 있으니, 어느새 꼬박 열두 달이 흐른 것.
멤버들은 모두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이며 각자 일을 갖고 있다. 그런 와중에 틈을 내어 생각을 발전시키고 글을 써내는 사람들. 한 해 뒤의 우리를 떠올려본다. 우리는 또 어떤 글감들을 거치고, 어떤 글들을 적어내며 함께 웃고 울게 될까.
글을 매개로 만나면 평소에는 잘 하지 못하는 깊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2주에 한 번씩 만나 서로의 글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누군가의 나'가 아닌, '오롯한 나'로 선다. 이 시간들로 더 단단하고 유연한 '우리'가 되길. 이 시간의 힘으로 또 살아갈 동력을 얻길.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떠오른다. 내게 그런 동료가 생겼다. 오래 함께 걸을 든든한 동료. 그동안 함께 쌓아간 글도 참 소중하지만, 우리가 일 년 동안 거둔 가장 큰 수확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그 소중한 사람을 만난 일 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