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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323호 ‘논산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높이 18.12m로 아파트 6층 높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석조 불상이다
국보 제323호 ‘논산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높이 18.12m로 아파트 6층 높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석조 불상이다 ⓒ 문화재청

특정한 연도를 기원으로 하여 햇수를 세거나 기록하는 '기년법(紀年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원의 근거에 따라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달리 적용하는 연대표기법은 대표적으로 단기(檀紀), 서기(西紀), 불기(佛紀) 등이 있다.

단기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해를 원년으로 삼는다. 오늘날 세계 공통으로 사용하는 서기(西紀)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해를 기원으로 한다. 약자로 A.D.(Anno Domini)로 표기하며 예수 탄생 이전은 B.C.(Before Christ)로 표기한다.

불기(佛紀)는 '불멸기원(佛滅紀元)'의 줄임말로 석가모니가 입적한 해를 원년으로 삼아 연대를 표기한다. 부처가 열반에 든 뒤 그의 제자들이 일정기간 동안 일절 외출을 금하고 수행에 정진하는 '안거(安居)'를 몇 번 했는가를 헤아리던 것이 그 유래가 됐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올해는 서기 2023년, 단기 4356년, 불기로는 2567년이 된다.
 
 논산 관촉사 전경. 아파트 6층 높이의 은진미륵의 크기 때문인지 사찰이 오히려 작아 보인다. 후백제의 땅을 내려다보고 있다
논산 관촉사 전경. 아파트 6층 높이의 은진미륵의 크기 때문인지 사찰이 오히려 작아 보인다. 후백제의 땅을 내려다보고 있다 ⓒ 논산시청

1956년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4회 세계 불교도회의에서는 석가모니의 생존 시기를 기원전 624년~기원전 544년으로 공식 채택하였다. 따라서 기원전 544년을 석가모니가 타계한 불멸일로 정하고 1956년을 불기 2500년으로 결정했다. 또한 양력 5월 15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정했다.

부처님 오신 날은 세계불교도대회에서 정한 대로 양력 5월 15일을 따르지 않고 국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싱가포르, 베트남,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등은 음력 4월 15일을 따르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대만, 일본, 홍콩 등은 음력 4월 8일(4월 초파일)을 채택하고 있다. 올해는 5월 27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며 성탄절과 함께 대체공휴일로 지정됐다.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지금으로부터 1651년 전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의 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수림왕 2년 전진(前秦. 351~394)의 왕 부견(符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아울러 전도승 순도(順道)와 불상과 경문을 함께 파견해 불교를 전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6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수많은 흔적들을 남겼다. 우리나라 문화유산 중 불교유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16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어온 불교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국보 323호 논산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일명 ‘은진미륵’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국보 323호 논산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일명 ‘은진미륵’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 논산 관촉사
 
투박하고 토속적인 '못난이 부처님'

2022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에는 국가지정문화재와 시도지정문화재를 합하여 15000여 건의 문화재가 있다. 그중 유형문화재의 최고 등급인 국보는 350여 건에 이른다. 국보 중에서도 거의 대부분을 불교 문화재가 차지하고 있고 '불상(佛像)'은 40여 점이 넘는다.

불교의 상징이면서 경배의 대상인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나타낸 것으로 부처상은 물론이며 보살상, 나한상, 천왕상, 명왕상 등을 포함한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상은 기원전 2세기경에 인도의 간다라 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형태의 불상 중에 아주 크고 특별한 석조 불상 한 구가 있다.

두툼한 입술. 뭉특하고 납작한 코. 옆으로 길게 늘어진 부리부리한 눈. 커다란 귀. 부풀어 올라 늘어진 볼과 이중 턱. 원통형의 굵고 짧은 목.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좁은 어깨. 몸에 비해 유난히 큰 손과 손가락. 오른쪽 손은 철제 연꽃 가지를 들고 있고 왼쪽 손은 손목을 꺾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댄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은진미륵 얼굴 부분
은진미륵 얼굴 부분 ⓒ 문화재청

아래쪽 몸통 부분의 옷주름은 음각으로 간략하게 모양만 표현했다. 그 아래로 드러난 발가락은 든든하게 땅을 딛고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고 균형도 맞지 않는다. 머리 위에 커다란 면류관 형태의 보개가 얹혀 있다. 보개와 얼굴이 전체 몸길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한마디로 독특하게 생긴 3등신 못난이 부처님이다. 보통의 불상에서 풍기는 인자함과 근엄함이 없는 모습에서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진다. 선이 굵고 터프한 '상남자' 스타일의 부처님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자주 봤던 국보 제323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이라는 공식 명칭보다는 논산시 은진면에 있다 하여 '논산 은진미륵'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석불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으로 높이 18.12m 폭 9m로 아파트 6층 높이다. 전체 무게는 부피와 재질 등을 고려해 계산하면 380여 톤이 된다고 한다.
 
 은진미륵의 얼굴 부분 좌측면
은진미륵의 얼굴 부분 좌측면 ⓒ 문화재청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 관촉사에 있는 이 석불은 좌대와 상·하체, 보개 등을 각각 다른 돌에 새겨 이어 붙였다. 고려 초기 태조 왕건의 25남 9녀 중 넷째 아들인 광종(재위 949~975) 때 만들기 시작한 석불은 경종과 성종을 거쳐 고려 제7대 왕 목종 때 완성됐다.

불상 조성과 관련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서기 968년 봄날 한 여인이 반야산 기슭에서 고사리를 꺾고 있는데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인이 그쪽으로 가봤더니 아이는 없고 땅속에서 큰 바위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광종은 당대 최고의 조각승 혜명 스님에게 불상으로 조성하라는 명을 내렸다.

혜명 스님은 석공 기술자 100여 명을 데리고 반야산으로 내려와 970년부터 1006년까지 37년에 걸쳐 석불을 완성했다.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호국사상'으로 조성된 은진미륵은 나라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에서 빛이 나고 국란이 생기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손에 쥔 연꽃도 색이 바랬다는 등 여러 가지 설화들이 전해진다.
     
 몸에 비해 유난히 큰 손과 손가락. 왼쪽 손은 손목을 꺾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댄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하의는 음각으로 간략히 표현했다
몸에 비해 유난히 큰 손과 손가락. 왼쪽 손은 손목을 꺾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댄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하의는 음각으로 간략히 표현했다 ⓒ 문화재청

국보에서 보물로... 다시 국보로

그렇다면 광종은 왜 이렇게 큰 불상을 왕도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논산에 조성하게 됐을까. 일부 학자들은 고려 초기 정치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주장하는 내용처럼 광종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지방의 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후백제의 땅에 커다란 불상을 세우고 왕권의 상징인 '면류관(冕旒冠)'을 씌워놨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 태조 왕건은 전국에 29명의 부인을 두는 결혼정책을 통해 호족들을 달래고 한편으로 왕권을 강화했지만.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생들을 굽어 살피고 있는 은진미륵은 20세기에 들어서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기존의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상과 조형미 때문이었다. 종교적 경배대상인 은진미륵이 '크고 투박한 3등신 못난이 불상'으로 전락한 데에는 일제 강점기시절 동경제국대학 교수였던 일본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1867~1935)의 영향이 컸다.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없다. 머리 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얼굴이 평범하며 의상의 수법이 간결하다. 이것은 거대한 돌조각을 감당할 기량이 부족한 조각가의 문제다." 세키노 다다시는 일본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심고 우리 문화를 저평가할 의도로 비난에 가까운 악평을 했다.
  
 오른쪽 손은 철제 연꽃 가지를 들고 있다
오른쪽 손은 철제 연꽃 가지를 들고 있다 ⓒ 문화재청
 
세키노의 평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 고고미술사의 선두주자였던 서울대학교 김원룡(1922~1993) 교수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삼각형 얼굴과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는 가장 미련한 타입이다. 그저 돌기둥에 불과하다. 이 불상에 한국인이 놀란다면 그 사이즈 때문이고 외국인이 감탄한다면 그 원시성 때문일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

완벽한 신체 비율과 조형미를 갖춘 통일신라시대 불상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이렇게 '못난이 불상'이 돼버린 은진미륵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여러 차례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1933년 조선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공포하고 이듬해 우리 문화재를 보물, 고적, 천연기념물 등으로 분류하고 목록화했다. 일제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문화재에는 국보보다는 한 단계 낮은 보물 등급을 부여했다. 보물 1호 경성 남대문, 보물 2호 경성 동대문, 보물 3호 경성 보신각종 이런 식이었다.
  
 얼굴과 면류관이 몸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얼굴과 면류관이 몸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 문화재청

은진미륵으로 불렸던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1940년 관촉사의 신청에 따라 보물 제346호로 지정됐다. 해방이 되고 1955년 우리 정부는 국보 지정제도를 마련하여 일제가 지정해 놓은 보물을 그대로 국보로 바꾸었다. 그 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제대로 된 국보 지정 제도를 갖추게 된다.

1963년 은진미륵은 재평가를 거쳐 국보에서 보물로 지정되며 한 단계 등급이 격하된다. 그동안 평론가들이 내린 혹독한 평가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물이 된 지 55년이 지나고 2018년 드라마틱한 대반전이 일어났다. 문화재위원회 국보심의회의에서 문화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은진미륵을 국보 제323호로 지정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적인 불상과 달리 파격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미적 감각을 담고 있는 가장 독특하고 독창성이 짙은 고려의 불상이다. 중후하고 역동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조형미를 갖춘 최고의 불교 조각이다...."
  
 보살입상의 발 부분
보살입상의 발 부분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들은 세키노 다다시나 김원룡의 평가와는 정반대로 최고의 상찬을 쏟아냈다. 이렇게 은진미륵은 80여 년 동안 네 번이나 운명이 뒤바뀌며 '못난이 불상'에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품 불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000년 전 고려 광종은 고도의 정치적 목적으로 '후백제의 땅'에 거대한 은진미륵을 세웠지만 불교에서 미륵은 특별한 존재다. 석가모니 이후 사바세계에 내려와 고통받는 중생들을 광명천지로 인도하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미륵은 곧 민중들의 꿈이고 희망이고 믿음이다. 비록 작금의 세상이 아비규환으로 치닫고 있을지라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간절히 바란다면 미륵의 세상은 금방 현실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136호(2023년 5, 6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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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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