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 김윤식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1934년 '문학')
산과 들과 바다를 품은 편안한 나루터, 전라남도 강진(康津)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과 시인 영랑 김윤식의 자취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유홍준의 말처럼 강진은 '다산의 아픔'과 '영랑의 슬픔'이 배어 있는 곳입니다.
영랑 김윤식(永郞 金允植 1903~1950)은 그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입니다. 한국인의 애송시 목록에 들어 있고 교과서에도 실린 이 시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강진에서 나고 자란 영랑의 생가에는 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순수시가 태어난 시인의 집 마당에 피어난 모란과 함께 초가지붕 위에 내려앉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했던 서정시인의 시심을 느껴보기 위해서겠지요.
고향 강진이 영랑의 문학세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시인은 47년의 생애 중에서 40여 년을 이곳 강진에서 지내며 시작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가 쓴 87편의 시 중에서 60여 편이 이곳 고향집 사랑채에서 쓰였다고 하니 강진은 곧 영랑의 '문학적 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랑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하마터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한 사연이 있습니다. 강진에서 500석 지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랑은 해마다 모란이 필 무렵이 되면 생가 사랑채에서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문학 지망생들을 초대해 시 창작대회를 열었습니다.
1930년대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문학 콘서트에 참석한 문인들이 각자의 작품을 발표하고 드디어 영랑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영랑도 앞마당에 화사하게 핀 모란을 보며 시 한 편을 지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시를 쓴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조선의 대문호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1950) 선생이 "왜 그걸 버리나, 이리 줘봐"하면서 읽어 보더니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낭독했습니다.
낭독이 끝나자마자 참석자들의 감탄과 찬사가 쏟아지며 박수갈채가 이어졌습니다. 영랑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명시가 쓰레기통에서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영랑이 삼백예순 날 마냥 섭섭해 울면서 기다린 '찬란한 슬픔의 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시인의 앞마당에 화사하게 피어있는 모란은 그 정체를 알까요. 영랑이 청춘 시절 '실연의 아픔'으로 목을 매달았다는 뒤안의 동백나무는 알고 있을까요?
이 시를 쓸 즈음 영랑은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친구 최승일의 여동생이자 훗날 한국 현대무용의 원류가 된 월북 무용가 최승희 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지독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젊은 영랑으로서는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최승희 와의 실연이 몹시도 슬펐지 않았을까요.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은 영랑이 기다린 봄의 정체는 '나라 잃은 설움'과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는 마음을 모란에 실어 표현했다고 설명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