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오랫동안 일본을 아주 미워했었다. 한국현대사 전공자로서 일제강점기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잔인함과 악랄함을 한순간도 잊어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 영국 쉐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문학 박사과정을 전공하는 한 영국 여성을 만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를 통해서 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수감되고, 고문 받다가 몸과 맘이 망가지거나 인생이 파괴된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그 영국 여성은 지금의 내 아내다).
그때부터 나는 한 인간이 단순히 어느 국가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 인간을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절감했다. 한국인 중에도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인 함석헌(1901~1989)이나 장준하(1918~1975)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독재자인 박정희(1917~1979)나 학살자인 전두환(1931~2021)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아내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일본 도쿄에서 살았다. 당시 일본에서 아내는 일본의 과거 반체제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지금까지 그들과 서신과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내의 일본 지인 중의 한 분이 바로 오이시 스스무(1935~ )다.
오이시는 일본의 '쉰들러'라고 불리던 후세 다쓰지(1880~1953)의 외손자다. 지난 2012년 3월 1일 KBS 역사스페셜은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 –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 편을 방송하기도 했다.
1911년, 31살의 후세는 '조선의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통해 일본의 조선병합을 침략으로 규정하며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 글 때문에 그는 일본 경찰에게 조사를 받고 고초를 치렀다.
그럼에도 이후 후세는 조선 독립 운동가들을 무료로 법정에서 변호했다. 1919년 2.8 독립 선언의 주체였던 최팔용 등을 변호해 내란죄 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했다. 1923년 밀정의 실존 인물 김시현 등을 변호했고, 1924년 도쿄 궁성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김지섭을 변호했다.
후세의 변호 행적 중 가장 유명한 예는 1923년 박열(1902~1974)과 가네코 후미코(1903~1926)에 대한 변호였다. 이들은 일왕을 폭살할 계획을 세우다 검거돼 법정에 섰다. 당시 이 재판은 일본 전역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때 후세는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고 변호하며 옥중 결혼 수속도 대신 해줬다.
다음은 이런 후세 다쓰지에 대해 그의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와 지난 4월 29일부터 5월 11일까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을 식민지 삼은 일본... '부끄러움'을 느낀 이 사람
- 1919년 어떻게 외조부 후세 다쓰지가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인권변호사가 된 것인지?
"외조부는 어려서부터 논어 등 중국고전을 공부했고 항상 중국과 한국을 사랑했다. 그 영향인지 그는 항상 다른 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차별을 반대했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이 많으셨다. 특별히 당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 놓인 것에 일본인으로 큰 부끄러움을 느끼셨고, 그런 상황에 분개하셔서 결국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맡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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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 후세에 대해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
"물론 많다. 어려서부터 나는 외조부와 한 집에서 살았다. 내가 18세가 되던 1953년 외조부가 돌아가셔서 나는 그때까지 외조부의 모습에 대해 상세히 기억한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외조부는 어린 시절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대해 들으면서 전쟁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지졌다고 하셨다.
외조부가 어릴 적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에 파병된 동네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당시 조선인들을 어떻게 학살했는지 경험을 영웅담마냥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고 하셨다. 당시 외조부는 그런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일본 어른들과 그걸 재미있게 듣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너무나 참을 수 없었다고 내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 어머니가 외조부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 중 생각나는 것은?
"어머니는 외조부의 맏딸이셨다. 그래서 외조부가 조선인들을 돕다가 일본 감옥에 수감되셨을 때 어머니에게 감옥에서 많은 편지를 보내셨고 어머니는 내게 그 편지들을 읽어주시곤 하셨다.
외조부는 1932년, 일본공산당에 대한 일본정부의 탄압이 거세던 시절에 법정에서 공산당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하셨다. 그러다가 '법정모독'으로 징계를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셨다. 그 후에도 2번이나 더 변호사 자격 회복과 박탈을 반복하셨다. 또한 외조부는 일본의 신문지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두 차례 선고 받아 복역하셨다."
일본 정부 가차 없이 비판... 변호사 자격 박탈에, 복역까지
- 1923년 관동대지진 후 최소 60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학살당했다. 당시 외조부는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고자 동분서주 하셨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외조부에게 들은 것이 있는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외조부는 이 사건이 일본 정부, 경찰,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로 인한 사건이라며 공개적으로 강력하게 비판하셨다. 그리고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이를 사죄하는 문서를 보내셨다.
또한 외조부는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다'느니, '우물에 독을 탔다'느니 하는 거짓 소문을 일본정부가 일부러 퍼뜨림으로써 일본인들이 잔혹한 조선인 학살사건을 일으키게 됐다고 하셨다. 결국 조선인들이 관동대지진으로 나빠진 일본민심의 억울한 희생양이 되었다며 일본 정부를 가차 없이 비판하셨다. 그로 인해 외조부는 일본 치안당국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
- 1926년, 외조부는 나주 궁삼면 토지분쟁의 변호를 맡기 위해 조선을 찾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외조부에게 들은 것이 있는지?
"외조부는 당시 일본의 동양척식회사가 조선의 농업에 적합한 기후, 토양과 편리한 교통조건까지 갖춘 나주 일대의 토지를 헐값에 강제 매수했다고 하셨다. 그러자 조선 농민들이 외조부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동양척식회사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외조부는 동양척식회사의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토지 매수 과정을 철저하게 조사하셨다. 또한 외조부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을 만나 일본의 조선 식민지 농업 정책을 비판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이 당시 신문에 연일 보도됐다고 하셨다."
- 당시 외조부가 조선인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시다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수감되는 고초를 겪으셨는데 당시 선생님의 모친을 포함한 외조부의 가족은 어떻게 그 어려움을 극복하셨는지?
"외조부가 수감되신 동안 외조모가 생계를 책임지시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조선인 학생들을 하숙생으로 받아서 자녀들 생계를 해결하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것도 어렵게 되자 외조모는 살던 집을 팔아 계속 작은집으로 수도 없이 이사를 다니시며 외조부 옥바라지와 자녀들 생계를 해결하시는 등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다고 모친이 늘 말씀 하셨다."
"외조부 살아계셨더라면, 한반도 분단에 가슴 아프셨을 것"
-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 외조부는 사후에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당시 감회가 어떠셨는지?
"당시 내가 돌아가신 외조부를 대신해 훈장을 받았다. 한국 대사는 내게 '한국을 모국처럼 사랑해주신 외조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답사로 '분단이 아니라 통일된 한국정부로부터 이 훈장을 받았더라면 외조부가 더욱 기뻐하셨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외조부가 살아계셨더라면 독립된 한반도가 분단된 상황에 대해 무척 가슴 아프셨을 것이다."
- 오늘날 우리가 외조부에 삶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안녕과 복지보다는 남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희생적으로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더욱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 외조부로부터 받은 가장 큰 영향이 있다면?
"외조부가 의열단과 조선공산당을 법정에서 변호하실 때 외조부는 이념과 사상을 떠나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고 한다. 외조부는 모친과 내게 왜 인간이 사회적 약자들과 사회정의를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한지 온 삶으로 보여주셨다.
- 끝으로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위해 향후 한·일간의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보는지?
"역지사지 즉, 입장을 바꿔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하고 싶다."
*책 <후세 다츠지>에 실린 저자 소개에 따르면, 오이시 스스무(大石進)는 1935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법률시보> 편집장 등을 거쳐, 1980년~2004년 주식회사 일본평론사 대표이사를 지냈다. <일본평론사> 회장, NPO법인 이사, 중국 저장대학 아시아법 연구 센터 명예 교수로 재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