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P는 홍대입구역 7번 출구에 위치한 공유오피스다. 마포구청이 관리하는 공공시설인 이 공간은 작가, 편집자, 소규모 출판사, 디자이너, 그림책 작가 등 출판 인접 분야의 창작자들을 위한 작업 공간이다. 이곳에서 첫 번째 북페어가 열린다. 책을 사랑하는 시민들을 작업자들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축제 [플랫폼P 북페어: 마포 책소동]을 준비하며 있었던 생생한 뒷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기자말] |
저녁 9시 반, 북페어 기획자 단톡방에 티셔츠 도안 5개가 올라왔다. 마감에 찌든 일러스트레이터 키박이 쉬는 시간에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작업물이다.
단톡방에서는 디자인 예쁘다고 다들 난리가 났다. 투표를 통해 두 가지 도안을, 최종 목업(제작에 들어가기 전, 실물과 비슷하기 만든 이미지) 대상으로 선정했다. 여기서 멈출 키박이 아니다. 다음날 오전, 그녀는 목업 이미지를 또 다시 5개나 들고 단톡방에 나타났다.
실물에 가까운 목업 이미지를 보여주자 기획자 7명이 참여 중인 이 단톡방은 더욱 과열됐다. 황유미 소설가는 우리만 입기 아까운 디자인이다, 티셔츠 브랜드를 본격 론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위터를 곧잘 하는 배현정 그림작가(솜프레스 운영)는 이 정도 퀄리티라면 SNS에 올려서 주문받아도 되겠다고, 100장은 거뜬히 팔 수 있겠다며 반짝인다.
그러자 서지형 큐레이터가 수요조사 가능하냐고 진지하게 묻는다. 선주문 받아보고 반응 괜찮으면 5가지 색깔별로 다 뽑아서 한 1000장 팔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나는 그 돈이면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 수 있겠다고, 플랫폼P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가슴 깊이 묻어둔 소망을 슬며시 드러냈다. 그러자 배현정 작가는 그 책은 반드시 나와야 한다며 맞장구를 치고... 그렇게 단톡방에서 대화는 밤낮으로 계속되었고....(여기 말리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결국 공식 티셔츠 색깔을 결정하는 데만 2박 3일이 걸렸다. 최종 후보 2개를 두고 설왕설래하다가, 노랑+핑크 조합의 티셔츠로 최종 낙점됐다.
이들은 도무지 적당히라는 걸 모른다. 따로 인건비를 받지도 않고 본인의 시간과 노동력을 자발적으로 들여가며 북페어를 준비하고 있는데, 오로지 일을 키울 생각밖에 없다. 무슨 이유로 이 7명의 창작자들은 마른장작마냥 활활 불타며 자가발전하고 있는 걸까.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를 ○○○으로 바꾸겠다니?
이 일의 발단은 작년 2022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포출판문화센터 플랫폼P(아래 플랫폼P)를 방문한 박강수 마포구청장은 이 건물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플랫폼P가 스터디카페나 일자리센터로 바뀐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우려는 곧 사실로 드러났다. 구청은 통상 3년 단위로 이어오던 위탁 업체와의 계약을 3개월, 6개월 단위로 쪼개서 계약하려다가, 업체의 반발로 현재는 올 연말까지만 계약을 연장한 상태다. 또한 신규 입주사 선발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오는 7월이면 기존 입주사의 계약이 대거 만료되는 상태에서, 새로운 입주사를 받지 못하면 작업실은 개점휴업 상태가 된다. 당장 내년이 어찌될지 플랫폼P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월 24일, 위기감을 느낀 입주사들이 모여 협의회를 결성했다. 출산 후 집에서 육아에 매진하던 나도 답답한 마음에 유아차에 4개월 된 아이를 태우고 작업실로 향했다. 이날 모임에서는 그간의 활동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운영진은 구청의 담당 공무원은 물론 각 정당의 구의원을 직접 만나 문제를 제기했다. 보도자료를 작성해 언론사에 배포해서, 언론사 4곳에서 플랫폼P 사태를 비중 있게 다뤄주었다. 마포구청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몰려가 민원을 넣고, SNS에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한 것도 52개의 입주사들이 기민하게 움직인 결과였다.
이들의 단결력과 행동력은 놀라웠다. 프리랜서 창작자이자 1인 기업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자기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것은 물론 협업에도 능하다. 그러니 플랫폼P 사태에 대해서도 이토록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상반기는 프리랜서에게 비수기인 계절이다. 본인들의 장기를 발휘하여 프로젝트처럼 정치 활동에 나서기 좋은 때다.
무엇보다 이 공간에는 작가, 편집자, 디자이너, 사진작가, 그림작가, 뉴스레터 제작자 등 출판 인접 분야의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다. 여느 때 봄 같으면 북페어를 비롯해 각종 행사에 참여하느라 바빴을 이들이, 이참에 우리 앞마당에서 축제를 직접 열어보자고 나섰다. 이 안에서 팀을 꾸리면 기획, 디자인, 홍보, 제작까지 원스톱으로 소화 가능하다.
사실 이 일이 있기 전부터 나는 플랫폼P 안에서 북페어가 열렸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시민에게 공간을 개방하고 체험하게 함으로써 플랫폼P의 존재를 알리고 정상화를 위한 서명을 받으면,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대의명분이 있으니, 팀원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협의회 결성과 동시에 북페어팀을 꾸릴 수 있었던 배경이다.
북페어 준비에 몰두한 사람들
4월 5일, 첫 회의가 열렸다. 자칭 '북페어에 미친 자'(배현정, 그림작가‧솜프레스 출판사 운영)가 합류했다. 게임 속에서도 책과 그림, 식물을 팔며, 혼자만의 북페어 부스를 꾸민다는 그녀는 국내 북페어를 섭렵하는 것은 물론, 상하이 등 해외에서 열리는 북페어에도 부러 참여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하다. 북페어를 기획하는 게 버킷리스트였다는 그녀는, 등장하자마자 북페어에서 해야 할 일의 줄기를 짜서 팀원들에게 안내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 없는 일은 절대 벌이지 않는 사람이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가는 조심스러운 성격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덥석 맡고 나니 불안해서 도망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내가 북페어 총감독이라니 말이 되나,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왜 하필 총회 자리에서 그런 제안을 해서 일을 벌였나 싶어 밤에 잠이 안 왔다.
체계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데는 젬병인 내가 6명이나 되는 팀원들과 함께 한 달 안에 북페어를 준비해야 한다니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다. 그래도 북페어에 대해 잘 아는 배현정 작가를 비롯해 경험 많은 창작자들이 함께하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일단 입주사에게 전체 메일을 돌려, 북페어 참가 의사를 물어보기로 했다.
눈물 겨운 참가사 섭외기
오는 13일에 있을 북페어에 참가 의사를 밝힌 입주사는 12팀이다. 2층의 넓은 공간을 채우기에는 조금 모자란 숫자다.
게스트로 동네서점을 초청하는 의견이 나왔다. 마포의 작은 동네서점들과 함께한다면, 의미도 있고 홍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처음 열리는 북페어에 이들이 판매자로 참여해줄지 의문이다. 5월 13일, 황금 같은 계절의 토요일에 책방 영업을 접고 다른 북페어에 참여하려면 그만큼 이익이 보장되어야 한다.
플랫폼P 북페어에 셀러로 참여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경제적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참여 제안을 하기에도 송구스럽다. 알음알음 아는 동네서점 중심으로, 북페어에 초대하는 메일을 조심스레 보냈다. 황유미 소설가가 보낸 이메일에 가장 먼저 답변을 준 것은 망원동의 터줏대감 이후북스였다.
"유미 작가님이 부른다면 당연히 가야지요. 행사가 취소되어도 우리는 플랫폼P에 갈 겁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답신을 기다렸는데 이토록 열렬한 환대라니, 마음이 스르륵 녹아버렸다. 헬로인디북스, 책방연희, 그림책방 곰곰, 가가77페이지에서도 흔쾌히 우리의 제안을 수락해주었다. 참가사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가열차게 홍보해리라 다짐해본다.
홍보 대작전
4월 19일, 드디어 포스터 디자인이 나왔다.
플랫폼P 사태를 사회면 기사로만 접하던 이들도, 이 포스터를 보고 나면 이 공간 자체에 흥미를 가질 것 같다. 포스터를 공개하자, 북페어에 참가를 원하는 입주사들이 10팀 가량 늘었다. 내부 참가사 21팀, 게스트 동네서점 6팀이 최종 참가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바글바글하니 괜찮을 것 같다.
트위터에 올린 포스터 이미지는 몇 만회 넘게 리트윗되었다. 인스타그램에서도 종종 우리 포스터를 만나볼 수 있었다. 플랫폼P 사태를 걱정스레 지켜보던 책방 주인들이 SNS에 포스터를 업로드해준 것이다. 동네서점 지도를 운영하는 남 반장이 동네서점 뉴스레터를 24시간 만에 뚝딱 제작해서 마포구 내 서점들에게 소식을 전해주었다.
평소 조용히 지내던 황유미 소설가가 대뜸 자전거를 대여해서 나타났다. 연남동 일대를 돌며 책방에 북페어 포스터를 배달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작가님은 내향인 아니었어요? 지난 2년간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며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렇게까지 잇몸을 드러내며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이다.
북페어가 뭐길래 다들 이렇게까지 열심인 걸까. 서지형 큐레이터는 말했다. "이 공간에서 받은 게 많잖아. 고맙더라고. 그 마음으로 신나게 하는 거지." 참고로 서지형 큐레이터는 이 행사를 위해 워크숍 제안을 3개나 거절했다고 한다. 행사가 많은 5월은 큐레이터에게 황금 계절인데, 만사 젖혀두고 플랫폼P 북페어를 위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조재무 사진작가는 말한다. "아, 돈 버는 일도 이렇게 재미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집회 현장을 비롯해 북페어의 일손이 필요한 모든 순간에 나타난다.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든다. 행사 디피와 도면 작업, 굿즈 제작 업체를 찾는 작업 등등 굉장히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지친 기색이 없다. 정신승리가 아니라, 우리는 정말이지 즐겁게 일하고 있다.
D-10, 우리가 마포구청 앞으로 달려간 이유
행사를 준비하는 사이, 비보가 있었다. 마포구청에서 플랫폼P 2기 입주사의 자격을 마포에 사업자등록을 한 마포 거주민으로 한정하겠다고 통보했다. 3기 입주사 모집도 감감무소식이다. 이 규정대로라면 2, 3기 입주사 중에 작업실에 남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리고 지난 3일 마포중앙도서관 송경진 관장이 파면되었다. 작은도서관 예산 삭감 지시에 문제를 제기하자, 박강수 마포구청장이 송 관장을 파면시켰다.
다음날인 4일, 우리는 마포구청 앞으로 달려갔다. 열서넛 남짓 모인 집회 자리에서 돌아가며 확성기를 잡았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구청장님, 5월 13일에 플랫폼P에서 열리는 북페어에 놀러오세요. 오셔서 창작자들이 만들어낸 성과물,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시고, 플랫폼P의 존재 의의를 다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꼭 만나고 싶습니다, 박강수 구청장님!"
집회를 마치고 작업실로 돌아온 북페어팀은 초대장 발송 작업을 했다. 박강수 구청장, 오세훈 시장을 비롯해 지역 정치인, 시민단체 인사 등에게 초대장을 보내며 꼭 방문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행운의 네잎 클로버까지 꾸욱 찍었다.
진인사대천명
북페어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21팀의 입주사, 6곳의 동네서점이 함께하는 이번 북페어에는 매시간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다. 사진 워크숍을 비롯해 삼행시 짓기, 키링 만들기, 포장 원데이 클래스, 아이들도 참여할 수 있는 드로잉워크숍, 그리고 대망의 럭키드로우 행사까지 알차게 준비했다. 공식 굿즈도 다양하다. 티셔츠, 머그컵, 스카프 등 아름다운 굿즈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북페어의 계기는 박강수 구청장이 마련해주었지만, 준비하는 내내 콧노래를 부르며 정성스레 상을 차렸다. 작은 도서관을 애정하는 마포 주민들, 홍대입구의 젊은이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담당 공무원과 박강수 구청장까지 모두모두 놀러와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이 공간에서 우리가 받은 것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플랫폼P 북페어: 마포 책소동'에 부디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린다.
덧붙이는 글 | [플랫폼P 북페어: 마포 책소동]
- 일시: 2023. 5. 13(토) 11:00~18:00
- 장소: 서울 마포구 신촌로2길 19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2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