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북맹'을 탈출했으면 한다."
"지금은 북과 대화를 사실상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로,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안 된다."
"한국이 미국·일본과 일체화 전략은 원천적으로 틀렸다. 자립성을 획득하는 게 한국 몸값을 높이는 것다."
"지금 정권이 잘하는 게 별로 없다. 가장 나쁜 게 외교이고, 다음은 노조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보다 한국을 더 잘 안다는 평가를 받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가 쏟아낸 말이다. 박 교수는 20일 오전 마산기독교청년회가 3·15아트센터 국제회의장에서 마련한 제100회 아침논단에서 '한국사회 현실과 미래 전망'을 주제로 강연했다.
"요즘 세계적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다"는 말부터 한 박노자 교수는 "한국이 비서구 주변부 사회의 세계체제에서 핵심부로 편입한 역사상 매우 드문 사례"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성공이 있다면 숨겨진 고통이 있다"며 갖가지 어두운 부분을 지적했다.
개발(독재)국가에서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되면서 재벌이 이끌어 가는 사회라고 한 그는 '서열화'부터 언급하며 "한국은 철저하게 서열화된 사회다"라고 했다.
"국민의 대표성을 갖는 국회의원을 보면 한국은 기업인, 교육자(교수), 법조인이 많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산층이나 저소득층인 노동자, 농민 출신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국회의원의 학력을 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석사 학위 이상이 가장 많은 나라다. 역대 내각을 보면 대학교수 비율이 높다. 한국처럼 교수 출신 장관이 많은 나라는 없다."
"나라 규모는 부유해졌지만 개인 차원에서는 놀랍게 불행"
"고학력, 고소득 집단이 국민의 대표가 되는 서열구조는 과연 공정한가"라는 질문을 던진 그는 "서울 3개 대학 출신 비율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미국은 하버드, 일본은 동경대학 출신도 한국 3개 대학처럼 그 사회의 대표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한국은 서열화가 굉장히 심하다. 그러면 경쟁이 치열해도 출발선이 너무나 다른 것이고, 기울어진 운동장의 상황에서 결과도 뻔한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서열화에서 가장 중요한 게 학벌서열"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같은 국립대학이라 하더라도 서울대와 지방 국립대의 학생 1인당 국가의 지원금액이 차이가 나고 거의 2.5배가 나는 경우도 있다"며 "결국 대학의 서열화를 국가가 조장해 나가는 셈이다. 그래서 대학 평준화를 해야 하고, 국공립 대학을 하나의 통합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게 첫 걸음이다. 서울대를 국립대 몇 호로 하고, 다른 국립대과 같은 구조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박 교수는 "서열적 위치가 낮은 이들의 무한 희생이 발생한다. 영세·자영업자나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과로, 불안, 산업재해, 산재사망이 발생하고 있다"면서 "한국 노동자들의 삶은 다른 나라에 비해 직장 스트레스가 훨씬 심하다. 서열화는 위쪽에 있는 사람들은 편하지만 아래 쪽 사람들은 훨씬 어렵게 산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 과로사 비율은 산업구조가 비슷한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훨씬 높다. 과로사의 영어 표기(karoshi)는 일본어 발음을 차용한 것이다. 1970~80년대 일본에서 과로사가 많았다. 지금은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많이 발생하고 있다"며 "이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길러지지 않으면 살기 어렵게 된 것도 원인이 있다"고 했다.
출산율과 관련해 그는 "사교육, 주거 등 여러 부분이 겹쳐서 출산율이 비정상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개인의 식민화, 서열화, 불평등 구조는 아이를 낳아 기를 여유를 주지 않는다"며 "한국은 나라 규모는 부유해졌지만 개인 차원에서는 놀랍게 불행하게 산다. 행복지수를 보면 소득 수준이 비슷한 유럽이 훨씬 높지만 한국은 매우 낮다"고 했다. 그는 "어떤 복지 정책도 한국의 출산율을 자연재생산이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없을 것"이라며 "한국도 이제 유럽 각국처럼 이민 등 인구 유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직장갑질, 서열화 구조에서 나오는 것"
박 교수는 초등학생들의 해병대 캠프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유순한 몸과 마음 만들기를 하는 것이다. 군사주의적 훈육의 지속이다"며 "어린 아이들을 군대 캠프에 보낸다면 다른 나라에서는 아동학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초등학생을 해병대 캠프에 보내는 게 정상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그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착취가 필요한 산업구조가 되면 인권감수성이 높아질 수가 없다"며 "직장갑질이 어느 사회나 있지만,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피해율이 높다. 한국은 폭언, 폭행 등 죄질이 무거운 직장갑질이 많다. 이는 서열적이고 착취가 가능한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저인권 감수성'은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지금 서구에서 노동문제로 경찰에 잡혀가는 일은 없다. 그런데 탄소배출을 하지 말라고 석유회사를 찾아가 농성하다 잡혀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기후는 그만큼 전 인류의 의제다. 한국은 탄소배출량이 굉장히 높다.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이다.
한국은 선진국이 된 만큼 그 명예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인간과 함께 자연도 피폐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한국이 수출 주도로 성장해 왔는데, 수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노동 착취를 해왔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해왔다. 앞으로도 이런 경제구조로 성장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재벌·대기업의 독과점 구도를 언급한 그는 "한국의 국민총생산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굉장히 높다. 상위 10대 기업의 GDP 대비 매출 비중을 보면,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의 4배 내지 2배 정도로 심하다"며 "거시적으로 과독점 구도가 심하면 극소수가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조로, 한국은 대단히 심각하다. 역피라미드 구조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세금과 노동 등이 거론되었다. 먼저 조세와 관련해, 박 교수는 "지금 한국에서는 생산보다 재분배가 필요하다. 대단히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재분배가 되지 않으면 불평등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며 "가진 사람한테 거둬서 못 가진 사람한테 주어야 한다. 그것이 기본 과제다"고 했다.
"세계에서 한국은 조세부담률이 높은 나라가 아니다. 한국은 부유층이나 기업에 더 많은 과세를 해도 충분하고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복지 지출을 높여야 한다. 한국은 소득 수준이 독일과 비슷한데 복지 지출은 거의 두 배 정도 낮다.
국민들이 아프면 독일은 의료보험으로 치료하는데 한국은 안 된다. 문재인 정부 때 국민보험보장률 70%를 목표로 했지만 달성하지 못했다. 독일은 국민연금으로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하나 한국은 국민연금으로 노후생활을 편하게 하기가 불가능하다."
'누구나 대학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제 아이는..."
노동 관련해 그는 "현재 한국은 노동시장의 비정상 구조다. 한국만큼 비정규직이 많은 사회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노르웨이는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5% 정도인데, 법적으로 비정규직 고용을 억제하고 있다. 비정규직은 계절성, 단기성, 대체성 등 조건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법적으로 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달성되지 않았다. 한국 비정규직은 12년 전과 거의 같다"며 "비정규직은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다. 경제 전체에 있어서 비정규직의 사용제한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공부문만 할 게 아니라 더 큰 규모인 민간부문까지 해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면 법을 바꾸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를 해야 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민주화가 되어야 한다"며 "대한민국은 노조 조직률이 여전히 낮은데 이걸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한다고 할 수 없다. 나아가 노동자들의 기업 경영 참여권은 법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은 이제 자본수입국이라기보다 자본수출국이다. 한국의 경제영토는 한반도보다 넓고 세계를 아우르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가진 비중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며 "한국이 아니라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한국 자본이 외국에 설립한 공장에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1100만명 정도다. 높아진 한국의 위상만큼 저임금,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질문이 쏟아졌다. "누구나 대학에 가야 하느냐"는 물음에, 박 교수는 "제 아이가 올해 21살인데 대학에 가지 않고 판매사원으로 일한다. 더 공부하고 싶거나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대학에 가는 것이지 반드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한국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학을 가야 한다는 인식이 높은데, 오슬로대학 학과에서 한때 신입생 나이 통계를 내보니 23세가 가장 많았고, 고교 졸업과 동시에 들어온 학생은 소수였다.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현 정권에서 가장 나쁜 것은 외교... 미일과의 일체화는 망국"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박 교수는 "북한에 대해 많이 알았으면 한다. 한때 많이 거론되었던 '북맹'이라는 말을 요즘은 잘 하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같이 살아가야 하니까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을 해야 하는데, 지금 정권은 통일정책을 포기하고 적대국가고 살기로 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포괄적 생태 복지국가'를 설명하면서 박 교수는 "한국 정치는 굉장히 역동적이다. 대한민국에서 정치세력은 여(국민의힘)도 야(더불어민주당)도 보수적이고, 정도의 차이만 있다. 기본적으로 시장경제, 대기업 위주 정책은 큰 차이가 없다"며 "박근혜가 선거 때 옛 민주노동당에서 내세웠던 복지를 이야기 했다. 그것은 밑으로부터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못된 통치자라 하더라도 밑으로부터 압박이이나 저항이 있으면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이어 "지금 정권이 잘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가장 나쁜 것은 외교이고, 그 다음이 노조에 대한 것이다. 노조에 대한 부당탄압은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ILO는 노조에 대한 활동을 보장하도록 돼 있다. 부당한 노동탄압에 노동자 분신 자살까지 초래했다. 다수가 집회를 하거나 성명서를 내거나 하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저항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한 질문도 나왔다. 박 교수는 "어머니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어머니 고향에서 전쟁이 났다. 전쟁은 모두를 황폐화시킨다"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의 패권이 느슨해졌기 때문에 발생했다. 거시적으로 보면 미국의 헤게모니가 약해졌다. 러시아는 가스 등 에너지를 서구에 팔지 않아도 되고, 궐프, 중국, 인도의 자본을 끌어들여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했다.
"열강 각축 속에, 서로 패권을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집권세력의 구상은 미국, 일본과 완전히 일체화가 되어 그 우산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것은 틀린 것이다. 한국에 육군 파병을 요청하면 최악 상황이다.
거절하기도 힘들고 요청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한국은 자립성을 획득해야 하고, 그래야 한국 몸값을 높여서 중국과 미국 대립 국면에서 한국은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그것이 이상적인 외교 노선이다. 미국·일본과 일체화는 망국이고, 통일은 더 이상 거론하기 힘들어진다."
일본에 대해, 박노자 교수는 "정치 독점이 가장 큰 문제다. 형식적으로는 다당제이나 실질적으로 자민당이 아닌 정당이 집권한 기간은 얼마 안 된다. 사실상 일당독재에 가깝다"며 "견제 세력이 없다. 상당히 투명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이런 구조에서는 역동성이 부족하고 이전 경로에 대한 의존성이 높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데 한계가 많고, 필요한 정책을 내놓기가 힘들다"고 했다.
한편, 강연에 앞서 마산기독교청년회(이사장 이인안)는 '아침논단 100회 기념식'을 열었다. 아침논단은 1999년 2월부터 거의 매월 한 차례 아침 시간에, 지역의 전문가들과 함께 강의·토론으로 열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