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파트 도서관
아파트 도서관 ⓒ 최승우
 
2023년 3월 21일 오후 2시 우리 아파트 작은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아래층에 있는 빈 공간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순간이었다.

은퇴한 지 2년이 지나니 '오늘 놀고 내일 노는 일상'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렸으나 요양 보호사와 아파트 관리인, 청소부가 대부분이었다.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고 업무 스트레스가 상당한 감정 노동자이기에 다가서기 쉽지 않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봉사 활동을 알아볼까?'라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여 있을 때 아파트 작은 도서관 봉사자 모집 공고를 접하고 도서관 봉사 활동에 참여를 희망했다.

지난해 9월 초, 아파트 도서관 참여 봉사자 5명과 관리소장, 아파트 동대표의 참여로 도서관 설치 및 운영을 위한 첫 모임을 했다. 남자 2명과 여자 3명의 도서관 봉사자는 각자 소개와 함께 임원을 선출했고 나는 감사가 됐다.

첫 모임은 도서관 개관과 운영을 위해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 회의였다. 2회 차 모임에서는 카톡방을 통해 도서관 이름을 추천하고 후보군을 정한 다음 최종 투표를 통해 아파트 작은 도서관 명칭을 정하기로 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여 도서관 명칭은 동네 이름에서 연유한 순수한 우리말 '큰내'로 결정했다.

도서관 이름을 정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다른 명칭을 제안했다. 민주적 의사 결정을 아무런 고민 없이 바꾸는 이들의 행위에 허탈감과 실망감이 밀려왔다. 연륜이 쌓이면 갖게 되는 이로움이 있다. 예전 같았으면 화를 내고 집단을 탈퇴했을 일을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했다. 잘못된 의사 결정은 이해할 수 없지만 "이름이 조금 다르면 어때"라며 도서관 자원봉사 활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사람들의 관심과 시간 투자는 바라는 일의 실패보다 성공으로 안내하는 경우가 많다. 8차례의 회의와 준비를 통해 도서관 등록을 마쳤고, 4개월 동안 도서관 임원과 자원봉사자의 협력으로 도서 분류, 라벨 작업을 진행했다. 도서 대부분은 아동 도서였고 아파트 주민이 기부한 책으로 도서의 청소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도서관 준비는 꾸준히 진행되었으나 속도는 더뎌 목표한 3월 개관을 넘어 5월 개관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궁하면 통한다.' 2월 초 사서 선생님이 아파트 도서관에 주 3회 상주 근무하게 되어 도서관 개관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천군만마의 위력으로 다가왔다. 전문가의 손길은 일의 속도를 배가시켰다.

사서 선생님은 전문가답게 책 라벨 및 도서 정리, 공간 배치에 대한 아이디어가 풍부했다. 시립 도서관의 불용 물품을 공급받아 서가와 책상, 의자와 책 소독기 등이 도서관의 텅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도서관 환경은 빠르게 변화했으며 목표했던 3월 도서관 개관이 현실로 다가왔다.

아파트 동대표회의에서 천만 원을 지원해 도서관에 필요한 물품 구매도 원활했다. 작은 도서관 임원과 아파트 동대표회의의 적극적 협조로 도서관이 제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으나 아파트 시공사의 태도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가 사는 임대 아파트 건설사는 도서관 지원과 운영에 관한 협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서관 개관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아쉬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정수기 설치에 대한 찬·반 문제로 갈등이 발생했다. 어떤 일을 추진하는데 생각이 다른 사람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한 가지 일을 도모하는 데는 대화와 타협, 양보와 관용,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각자의 최선이 양보와 타협, 관용의 정신이 발휘되는 가운데 모두가 동의하는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민주주의 사회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도서관 개관 특별 전시
도서관 개관 특별 전시 ⓒ 최승우
 
시간은 간다. 경험 부족과 갈등의 상처를 딛고 도서관은 문을 열었다. 도서관을 개관하고 3개월이 지났다. 무관심과 냉랭함 속에 문을 열었던 도서관이 주민들의 참여와 관심으로 점점 따뜻한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숫자 0으로 시작한 도서관 회원이 100명을 넘었다.
  
 사서 선생님과 함께 하는 종이접기
사서 선생님과 함께 하는 종이접기 ⓒ 최승우
 
도서관 사서 선생님은 초등학교 1·2학년 8명을 대상으로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에 종이접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매주 목요일 오후 4시 30분이 되면 도서관은 특유의 정적인 모습을 상실하고 아이들의 북적거림과 새로움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활기차다. 지난 5월 4일에는 어린이날 행사를 열었다. 동화 속 인물 색칠하기, 사탕 꾸미기와 보드게임, 책을 대출하는 아이에게 캐릭터 열쇠고리를 선물하기도 했다.

책 읽는 사회 문화 재단에서 후원하는 2023 독서 동아리 지원사업에 도전하여 선정됐다. 아파트 주민을 주축으로 구성된 8명의 독서 동아리 회원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정하여, 함께 읽으면서 각자의 다름과 같음을 경험하면서 서로가 익어갈 것이다. 5월 20일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의 힘'이라는 책을 집필한 전 JTBC 앵커 이정헌 작가와 북 콘서트를 갖기도 했다.
  
 독서 동아리
독서 동아리 ⓒ 최승우
 
'도서관 개관이 잘 이루어질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작은 도서관이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실의 문을 당당하게 열었다. 어떤 것으로 도서관을 채울 것인가는 우리들의 또 다른 과제이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의 맛처럼 아파트 도서관도 맛 좋고 멋진 프로그램을 준비해야겠다. 주민의 심드렁한 표정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아직도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작은 도서관이 싹 틔우고, 뿌리 내리고 아름드리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모진 풍파를 이겨내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야 한다. '처음처럼', '중단없이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은퇴자의 도서관 자원 봉사#아파트 도서관#도서관 개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직을 정년 퇴직한 후 공공 도서관 및 거주지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도서관 자원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백수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