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이 충북 충주 읍내를 장악하고 마즈막재(마스막재)를 넘어 활옥동굴이 있는 목벌리로 넘어갔다. 그렇기에 목벌리에 이웃해 있던 욕각골(요각골)에 피난해 있던 유종호(1935년생) 가족은 그 마을에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전시라 하더라도 도시생활을 했던 유종호 가족으로서는 피난지 욕각골에서의 잠자리와 변소가 불편하기만 했다. 충주읍 용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피난 보따리를 이고 진 그들이 마즈막재가 가까워지고 한센병 환자의 오두막께에 이르렀을 때였다.
맞은편 계족산(계명산) 산비탈 종민동 가는 산길이 지나는 바로 위의 지점에 하얀 것이 눈에 띄었다. 대한민국 군경이 처치하고 버리고 간 보도연맹원 시신이었다. 이 시신들은 국군이 수복하던 1950년 9월 말까지 그곳에 방치됐다가 그해 10월경 수습됐다.
그렇다면 충주중학교 학생 유종호가 1950년 7월 초 마즈막재에서 목격한 20여 구의 시신은 어디 사람들이었을까? 분명 충주 읍내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읍내 사람들이었다면 북한군이 점령하던 인공시절 내내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유종호, <회상기-나의 1950년>, 현대문학)
또한 충주 보도연맹원들은 싸리재(함지못)와 사직산에서 7월 5일 학살됐기에 마즈막재에 있던 시신의 임자는 다른 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이었을 것이다.
피난 믿고 도장 찍었는데... 알고 보니 '살생부'였다
"아부지 언능 가유." 재봉(당시 21세)이는 아버지 김흥근(당시 47세)에게 빨리 면사무소로 가자고 했다. 살미면 문화리 김흥근·재봉 부자는 1950년 7월 4일 보리쌀 두 되씩을 갖고 살미면사무소로 발걸음을 향했다. 면사무소에 모인 이들은 관내 국민보도연맹원 70여 명이었다.
자신들을 후방으로 피난시켜 줄 것으로만 알았던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은 그날 밤 걸어서 충주경찰서로 이송돼 유치장에 구금됐을 때였다.
다음날 해가 밝아지면서 유치장에 구금됐던 충주 보도연맹원들은 사직산으로 이동됐고, 그곳에서 1차 학살이 집행됐다. 총소리에 김재봉은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입이 새파래졌다. 잠시 후면 자신과 아버지가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의 아들 재봉이의 얼굴을 보는 아버지 김흥근의 속마음도 애끓었다. 해방 후 마을 청년들이 "품앗이를 하려면 여기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내민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것이 살생부가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터이다. 더군다나 자신만이 아니라 아들 재봉이까지 도장을 찍었으니 말이다.
김흥근·재봉 부자를 포함한 충주 보도연맹원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싸리재(일명 함지못)였다. 야트막한 산 초입에서 보도연맹원들을 둘러싼 이들은 충주경찰서 경찰과 6사단 7연대 헌병대였다. 헌병대 장교의 턱짓에 군경의 방아쇠가 움직였다. 살미면 보도연맹원 73명이 삶을 달리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필자는 2년간 충주지역사회연구소 전홍식 소장과 충주유족회 김복영 회장과 함께 살미면 마을을 다니면서 65명의 피해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이 중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아나키스트 서정기(1898년생)도 있었다. 흑기연맹과 문예운동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했던 그는 2차례에 걸쳐 6년간을 복역했다. 그는 국민보도연맹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요시찰인물로 예비검속돼 싸리재에서 학살됐다.
또한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충주극장에서 변사(辯士)로 활동한 고승훈도 싸리재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야 했다. 남로당 충주 총책이었던 그는 한국전쟁 직후 경찰서 차량에 탑승해 "국군이 해주를 탈환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라는 방송을 했지만 그 역시 학살의 화살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충주 보도연맹원들이 사직산과 싸리재에서 죽임을 당하기 하루 전인 1950년 7월 4일 마즈막재에서 군인의 총질에 쓰러진 이들은 누구인가?
횡성 사람 20명 태워 영천까지 데려가 집단 희생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충주중학교 학도호국단 비상연락망을 통해 등교하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7월 1일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한 반에 20% 정도만이 있었다.
선생들은 교실의 책걸상을 복도로 옮겨 놓으라고 했다. 홍천지방 피난민들이 대거 내려왔는데, 그들의 수용 공간으로 교실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피난민 중 보도연맹원들이 어디론가 끌려가 학살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당시 충주중학교 교실에 수용(구금)됐던 아버지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김민수(가명)의 증언이다.
"아버지가 충주중학교 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인가 밥을 해 날랐어요. 7월 4일에 갔는데, 방금 지에무씨(GMC) 트럭이 출발했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강원도 보도연맹원들하고 아버지가 함께 실려 간 거죠. 교실에 있던 피난민 중 여성과 노약자는 풀려났다고 얘기 들었어요."
2007년경 김민수가 충북 제천에서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최아무개 조사관에게 증언한 내용이다. 유종호와 김민수의 증언을 종합하면 충주중학교 교실에 수용됐던 강원도 홍천 보도연맹원들이 마즈막재에서 대한민국 군인에게 처형됐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막연한 추측일까? 6사단 사령부에 근무했던 김인철의 증언은 이것이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확신하게 해 준다.
"우리 6사단 CP(사령부)가 원주로부터 충주로 이동하고 보니 이곳에서 충북 지방의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많은 사상범 등과 춘천, 원주 등지에서 이송된 사상범들까지 구치돼 있었다. (중략) 아침 일찍이 사단 헌병 참모 보좌관 모대위(성명 미상)가 나를 찾아와서 사상범 처리 문제에 대해 협조해줘야겠다며 대략 다음과 같은 상황을 설명했다. 사단의 관계 참모 및 지방당국과 협조한 결과 현재 이곳에 구치돼 있는 사상범들을 타처로 함께 이송할 필요가 없이 이곳에서 종결하기로 합의를 봤다고 했다."(김인철, <3.8선에서 휴전선까지>, 보순당 /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에서 재인용)
즉 강원도 춘천, 홍천, 횡성, 원주 보도연맹원들은 현지에서 학살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으로 인해 그 일부를 횡성과 원주에서 처형한 다음 나머지를 충주에서 처형한 것이다. 강원도 홍천에서 충주까지는 250리(약 100km) 거리다. 과연 전시에 보도연맹원들을 250리 길이나 이송시켜 처형할 수 있었을까?
횡성경찰서도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살해했는데, 1950년 7월 1일경 경북지역으로 철수하면서 이들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을 우려해 (횡성군 청일면 보도연맹원) 주요 인물 20명 정도를 차에 태워 영천까지 데리고 간 후 집단 희생시켰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강원 남부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2010』
강원도 횡성에서 경북 영천까지는 243km 거리다. 또한 충북 영동군 보도연맹원 중 청년방위대원들은 영동역에서 기차에 태워져 경북 경산군(현재의 경산시) 중앙국민학교로 이송된 후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됐다. 영동군 보도연맹원 최소 89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영동역에서 코발트광산까지는 117km 거리다.
즉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軍)은 국민들을 신속하게 후방으로 피난시켜야 하는 상황 한편으로,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추정케 하는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1950년 6월 9일, 군이 강원도 서부지역 일대에 내린 명령이다.
- 각 연대는 적의 아(我) 주저항선 침입을 예상 시는 좌기 계획표에 의한 주민 철수를 실시하라
- 각 대 철수 책임자는 지방인 집합소까지 인솔 도(군) 책임자에게 작전지구 주민 철수 인증(별지) 급 철수인으로 인도하라
- 지방인의 집합소까지의 이동은 헌병의 관리를 받으며 지방인의 자동차 운영은 원칙적으로 불허한다.
이 명령이 내려진 것은 한국전쟁 발발 16일 전이다. 즉 군이 유사시에 주민과 요시찰 인물에 대한 소개 작전을 수립했음을 알 수 있다. 소개 작전의 주요 주체는 헌병대였는데, 실제 전쟁 발발 후 소개 작전의 주 대상은 국민보도연맹원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도영 박사는 미국립문서관리청에서 한국전쟁 전 민간인학살 관련 사진을 찾아내 공개했다. 1950년 4월 14일 서울에서 동북으로 10km 지점에 마련된 처형장에서 39명의 죄수들이 처형된 것이다.(이도영, <죽음의 예비검속>, 월간 말, 2000)
미군 비밀문서에는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이며 정부 전복을 기도한 자들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이때는 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이고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도 아니어서, 불법적인 학살이 한국전쟁 전부터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했을 때 한국전쟁 전부터 유사시에 보도연맹원과 요시찰 인물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수립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헌병은 국민에게 무엇이었나
1950년 9.28 수복 후 충주사범 병설중학교 학생 신경림(1936년생, 현재 시인)은 성급하게 충주군 노은면 연하리로 돌아왔다. 그렇기에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을 피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태창광산 근처 보련산으로 피신했다.
며칠 후 한 대의 지프차가 광산에 들이닥쳤다. 태극기를 꽃은 헌병 차였다. 여기저기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신경림은 주민들과 함께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실로 3개월 만에 보는 태극기 앞에서 마음이 울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프차 위의 (8사단) 헌병 소위는 주민들의 환영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금을 찾기 위해 허겁지겁 태창광산에 온 것이다.(이재무, <생의 변방에서>)
태창광산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개광해 금과 은을 생산했던 곳이다. 즉 헌병 소위는 주민들 중 부역혐의자를 색출하거나 치안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그때, 금덩어리를 불법적으로 획득하는 데 정신을 빼앗긴 것이다.
헌병(MP)은 군의 경찰(Military Police Corps)이다. 즉 헌병은 유사시에 주민의 안전한 지역으로의 소개와 후방지역의 치안유지와 군기 확립이 주요 활동이어야 한다.
그런데 헌병대는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원을 처형하는 데 주력했다. 그해 가을 수복 시에는 일부 헌병에게 한정된 것이었겠지만 주민들의 재산을 편취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헌병은 국민에게 무엇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