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
나는 창덕궁을 매우 좋아한다. 낙선재의 화계에 꽃이 핀 장면을 보고 반해버린 어느 해인가부터는 꽃 필 시기를 헤아려 꽃을 보러 갔다. 이왕이면 엄마와 함께 보고 싶어서 부산에 계신 엄마가 타고 올 KTX 열차를 예매해서 보내드리고는 함께 봄꽃 구경을 하곤 했다.
엄마와 함께 창덕궁의 봄꽃을 구경하던 처음 몇 년 동안은 그저 엄마와 함께 꽃구경을 해서 좋았다. 몇 년을 봄마다 엄마와 함께 창덕궁을 걷다보니 이것이 봄을 맞는 엄마와 나만의 의식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생각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엄마와 내가 함께 창덕궁의 봄꽃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문득 서운해졌다.
그러다 답 안 나오는 생각을 하면서 지레 슬퍼하지 말고 그저 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엄마와 창덕궁 봄꽃을 보자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래도 창덕궁의 꽃을 함께 볼 봄이 10번쯤은 더 남아있겠지 생각했다.
갑자기 무릎인공관절교체술이라니
올해도 어김없이 봄꽃이 피었다. 4월 초일 거라고 어림짐작한 것과 달리 올해는 벚꽃을 비롯한 모든 꽃들이 일찍 피었다. 창덕궁 후원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올해는 꽃이 일찍 핀다는데 창덕궁의 홍매화가 벌써 다 핀 거 아닌가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주말에 서울에 오실 수 있는지 물었다. 엄마는 요즘 무릎이 안 좋아져서 하루 3천보 이상 걷기 힘들다 하셨다. 많이 걷는 날은 밤에 다리가 너무 아프다고. 나와 함께 봄꽃을 보며 걷다보면 분명 마음이 앞서서 무리를 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작년에만 해도 같이 꽃구경을 했는데 올해부터 당장 창덕궁을 같이 걸을 수 없다고? 엄마와 함께 꽃구경을 할 10번의 봄을 빼앗긴 것 같았다. 꺼내먹을 도토리가 넉넉하다고 생각하던 다람쥐가 모아둔 도토리 창고를 몽땅 털린 것처럼 황망했다. '조금만 천천히 나이들어 주시지.' 그래도 엄마에게는 서운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 내년에 같이 보러 가요. 엄마, 내 친구는 30대에 수술했고 지금도 잘 걸어요. 친구 엄마들 중에도 수술하고 10년 이상 쌩쌩하게 다니시는 분들 많더라고요. 엄마도 얼른 수술하고 나랑 10년 더 꽃보러 다니자."
부러 가볍게 말했다. 연세가 많은 엄마가 그냥 시간이 지난다고 다리가 나아지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인공관절 수술을 권했다. 엄마는 수술을 하지 않고 버텨보려고 하셨다. 그러다 집안에서 걸어다니는 것도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진 어느 날 결심을 하고 그렇게 수술을 했다.
엄마가 병원에 있는 동안 '무릎인공관절교체술'이라는 단어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무릎의 동그란 뼈를 위아래로 약 20센치 가량 세로로 길게 절개한 사진들이 나왔다. 그 부위는 바람만 불어도 쓰라릴 것 같았다.
엄마가 병원에서 하루하루 기력을 되찾아가시는 동안, 입고 걸어다녀도 저 상처가 옷에 닿지 않을 만큼 헐렁한 바지를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입었을 때 몸에 붙지 않고 적당히 모양을 유지해줄 천을 원단장에서 찾아서 엄마가 퇴원하시는 날짜에 맞춰 보내드렸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바지를 입고 서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셨다. 바지만 보이도록 빛이 다 날라가게 찍은 사진을 보니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아마 엄마가 바지로 갈아입고 나와 아빠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겠지. 아빠가 겉으로는 대충, 하지만 내심 열심히 딸이 만들어준 바지만 보이게 찍어주셨을 것이다.
수술 후 상태는 어떤지 묻는 나에게 엄마는 '꺾기'를 잘 하고 있다고 했다. 새로 집어넣은 무릎 관절을 구부려보는 동작을 말하는 것 같은데 '구부리기'나 '굽히기'가 아니라 '꺾기'라는 표현을 쓰는 게 낯설었다. 자연스럽게 되는 동작이 아니라 억지로 꺾으려고 부단히 애를 써야하는 고충이 느껴졌다.
처음 통화할 땐 다소 가라앉아있던 목소리가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졌다. 70대도 중반을 넘긴 연세이지만 수술 후 하루가 다르게 몸이 회복하는 게 느껴진다고 하셨다. 나이가 들어 늙어가기만 한다고 느껴왔지만 막상 수술로 몸에 칼을 대고 나니 몸이 하루하루 나아지는 생명의 에너지를 느끼게 되는 아이러니라니. 전화기 너머로 엄마와 나는 몸의 회복력에 감사해했다.
창덕궁 나들이, 스무 번도 거뜬하시길
수술 후 소감이 어떠신지 물었다. 결심하기를 잘한 것 같다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엄마는 "관절 교체 안 하구로 잘 애껴써라"고 말씀하셨다. 걷는 것도 좋지만 무작정 너무 많이 걷는 건 관절에 무리가 간다고 근육 운동도 꼭 해야한다고도 하셨다.
고통이 주는 지식이 있다. 나도 목디스크로 고생한 후에는 머리 뒤통수에 베는 베개를 쓰지 않게 되었다. 누운 자세 그대로 잠들었다 일어나는 나에게 뒤통수를 높이는 베개를 베고 자는 것은 잠자는 5~6 시간 동안 목이 1자로 고정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아침이면 방금까지 자고 일어났는데도 왜 이렇게 목이 뻐근할까 싶었는데 베개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로는 목의 커브를 동그랗게 받칠 수 있게 수건을 말아 목이 끝나는 부분이자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부분에 대고 자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는 동안 목의 커브를 확보해주자 아침에 일어날 때 목이 덜 뻐근했다.
엄마도 무릎 연골이 닳아 없어져서 통증을 겪고나서 무릎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알게 되신 것 같았다. "우야든동 대퇴사두근을 기르는 운동을 열심히 해놔라."
평소 들어보지도 못하던 근육이 엄마 뇌에 굵직한 지식의 터널을 뚫었다. 당분간 엄마 생활의 우선순위는 수술 부위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 하면 그 근육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놓일 것이다.
그 답을 찾아가실 때 딸이 만든, 상처난 무릎 살갗을 건드리지 않을 넉넉한 바지가 매일 함께하는 절친이 되어주면 좋겠다. 뺏긴 줄 알았던 엄마와의 창덕궁 봄나들이를 열 번 아니라 스무 번도 더 할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