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할머니 댁 안방 한편에 놓여 있던 자개장롱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색찬란한 산과 꽃, 학의 모습에 빠져들곤 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우연히 보게 된 EBS <극한 직업>에서는 나전칠기 공예품 하나를 만드는데 꼬박 하루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깨지기 쉬운 자개를 다루려면 세심한 손놀림과 높은 집중력도 필수다. 할머니 댁의 장롱이 아름다웠던 이유가 단번에 이해됐다. 그렇기에 가격이 저렴할 수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3만 원일 수가 있지?"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그 나전칠기 공예품이 단돈 3만~4만 원대에 팔린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예전에 TV에서 본 장인의 모습을 떠올리면, 3만 원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과 SNS에 '나전칠기'를 검색해봤다.
저렴하게 좋은 공예품을 '득템'했다는 글이 수십 개가 넘었고, 실시간으로 자기도 꼭 가봐야겠다는 댓글이 남겨졌다. 그리고 그 화두의 중심에는 남대문 시장 중앙상가에 있다는 전통칠기 전문점 '참빛공예'가 있었다.
참빛공예는 자개 공예품을 약 70년 동안 만들어온 노한근 대표(80)가 운영하는 곳이다. 그런 장인의 제품을 그토록 싸게 파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5월 24일,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노한근 대표를 만나 그 사연을 들어봤다.
가게 정리하려고 싸게 팔았는데
"싸게 팔아서 얼른 치우자. 그런 마음이었어."
노 대표는 가게를 접기로 마음먹고 재고품을 싼 가격에 내놨다. 그때 마침 자개함을 사기 위해 남대문 시장의 혼수 용품점을 돌아다니던 이가 가게에 다녀갔다. 그리고 그 손님이 트위터와 블로그에 정성스레 남긴 방문 후기가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그렇게 4월 16일, 참빛공예를 향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자개함을 3만 원대에 살 수 있다는 소식이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 손님이 와서 얘기하는 거야. 여기 다녀간 손님이 글을 이렇게 올렸는데 아시냐고. 내가 어떻게 알어? 인터넷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 근데 지난 5월 8일에는 손님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오는지, 여기 (상가 앞) 골목이 꽉 막혀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어(웃음). 그때 나도 놀랐지. '와, 이게 무슨 일이야'."
그렇게 4월 말쯤부터 시작된 인기는 한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 도중에도 자개함이 남아 있냐는 문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옆에서 손님을 응대하던 노 대표의 부인이 대전, 대구, 부산 등 전국구에서 손님이 오고 있다고 했다. 노 대표는 너무 자랑하는 것 같다고, 그만 얘기하라면서도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게가 곧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노 대표에게 관두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말하는 손님도 다수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이 좋은 듯 미소 짓다가도, 매장에 진열된 제품과 창고에 남아 있는 재고까지 다 팔리면 장사를 마무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자개를 다뤄온 그에게 이제야 사람들이 나전칠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쉽진 않은지 물었다.
"건강하신데 왜 관두냐는 거야. 그런 걸 보면 '내가 일할 때 좀 그러지' 하고 안타까워. 근데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지금 알아주는 건 잠깐 반짝하는 거야. 오래 가지 않아.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오직 나전칠기만이 살 길이었던 때
노 대표에게 큰 미련이 없어 보이는 데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그는 중학교에 다니다 자개 공예 기술을 배우는 공장으로 가게 됐다고 한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을 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물건을 팔기 위해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녔지만, 쉽지는 않았다. '안 사요'라는 거절의 말을 들을 때면 부끄러웠다고도 했다.
"기를 쓰고 만들었는데 그런 푸대접을 받는 거야. 삼십 대가 넘어서 사십 대가 되니까 이 짓(물건을 팔러 돌아다니는 것)을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만든 건 내가 팔아보자. 그런 생각으로 가게를 시작했어."
처음 시작은 현재 참빛공예가 위치한 남대문 시장 중앙상가의 3층이었다. 장사가 꽤 잘 되자 '서울공예사'라는 이름으로 도로변에 5층짜리 큰 건물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전율이 낮아 재고가 많이 생기는 나전칠기 제품 특성상 가게 운영을 위해 지출되는 비용은 막대했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나전칠기는 생필품이 아니라서 나라의 경제적 상황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나전칠기는) 없어도 살잖아. 그래서 제일 먼저 타격을 입어. 재고가 자꾸 쌓이는 거야. 조금 벌었던 거 다 까먹으면서 버텼는데, 이제 안 되겠더라고. 나는 물건을 만들고 가게는 동생이 맡아 했어. 근데 장사가 너무 안 되니까 동생이 뇌경색으로 쓰러졌어. 얼마나 고심했으면 쓰러지냐고. 그때 '아, 이건 아니다' 싶었지. 그래서 내가 최종적으로 (가게를) 정리하려고 이렇게 나와 있는 거야."
그는 어떤 미련이 남아서 지금까지 나전칠기를 만들고, 가게를 지켜온 건 아니라고 말했다. 자식들은 자기처럼 고생하지 않고 출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개쟁이'로 살아온 것이라고 했다. 1970년대에 나전칠기의 대중화를 이끈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도 손사래를 쳤다. 본인은 그저 당시의 흐름을 따랐을 뿐이라며 말이다.
나전칠기 향한 '사랑'마저 끝난 건 아냐
"이제 집에다가 조그만 공방 하나 만들어서 나 혼자 몇 점씩 만들어보려고 해. 놀 수는 없고, 아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웃음)"
노 대표는 참빛공예가 문을 닫아도 자개 공예 자체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 집에서 작게나마 나전칠기 제품을 계속 만들 것이라고 한다. 공예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도 이미 집에 다 마련돼 있다.
그는 마지막 제품이 팔리고, 가게의 문을 닫게 되는 순간을 상상하면 시원섭섭할 것 같다고 했다.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결국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 지금에 이를 수 있어 감사하다고 했다.
어느덧 빈 곳이 늘어난 진열대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전칠기가 어떤 존재로 여겨졌으면 하는지 물었다. 답변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해 온 사람처럼 곧바로 입을 뗐다.
그에게 나전칠기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가구이거나 공예품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 대표에게 나전칠기는 항상 "그냥, 보면 좋은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쓰던 자개장롱을 자손들이 이사 가면서 버리는 모습을 보면 화도 난다. "그게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데" 하면서 말이다. 그는 사람들이 나전칠기를 너무 모른다고 말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개도 제 나름대로 색깔을 갖고 있어. 전복 껍데기마다 자란 환경이 달라서, 나름대로 색깔을 지니고 있다니까. 그냥 그런 걸 좀 감상하라는 거지. 오래 되면 깨지고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깨지면 깨진 대로, 수리를 해도 되는 거니까 오래오래 간직했으면 좋겠어. '에잇' 하고 버리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