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증의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대안학교의 특수교사로 11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발달장애 학생들이 자립과 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 및 수업을 합니다. 캠핑, 농사, 라이딩, 메타버스 등 여러 가지 도전을 하다 드디어 해외 자유여행까지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미디어에 자주 비치는 중증의 장애인들과 또다른 발달장애인들을 보며 장애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며 글을 씁니다. [편집자말] |
오사카에서의 첫 아침. 들뜬 아이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아파트형의 숙소는 별도의 조식이 없는터라 전날 편의점에서 각자 사 온 빵, 컵라면, 샐러드, 도시락 등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일본의 편의점은 워낙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있어 고르는 재미가 있었고, 제각각 조리법이 달라 아침부터 또 다른 공부가 시작되었다. 선택한 메뉴에 따라 그냥 먹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전자레인지에 돌려야 하는 것, 뜨거운 물을 부어야 하는 것, 뜨거운 물을 부었다가 따라내야 하는 것 등 종류가 다양했다.
요리는 삶에 필수적인 기술 중 하나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때에 따라 요리를 정규 수업으로 운영하기도 하고, 캠핑, 농사 등 프로젝트 수업과 연계하여 진행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요리를 하려면 레시피를 조사하고, 장 볼 목록을 정하고, 비용을 계산하고, 재료를 구입하는 등 사전 준비가 많이 필요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도 1-2인분으로 나와있는 재료의 양을 인원수에 따라 계산하고, 또 마트의 포장 단위로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다. 초보자가, 시간 내로 할 수 있는 요리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밀키트나 간편조리식품이 급격하게 유행하며 우리 아이들도 보다 쉽게, 더 다양한 요리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살아가면서 실제적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이쪽이 훨씬 높은지라 몇 년 전부터는 밀키트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물론 발달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에겐 밀키트도 마냥 쉽지는 않다. 레시피를 읽고, 사용되는 용어의 의미를 알고, 순서와 시간을 지켜 조리를 하고, 쓰레기의 종류에 따라 분리배출을 하고, 뒷정리를 하는 일련의 과정에도 모두 교육이 필요하다.
컵라면 정도는 죄다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막상 해보면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속속 발생한다. 미지근한 물을 붓거나 덜 익은 면을 먹는 건 예삿일이다. 컵라면 뚜껑을 반만 뜯는 것, 스프를 쏟아지지 않게 찢고 탈탈 털어넣는 것, 희미한 선을 보며 물의 양을 맞추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살다보면 그냥 하게 되는 많은 것들에 우리 아이들은 세심한 교육과 반복적인 연습을 필요로 한다.
분주한 아침, 시간에 쫓기면 일일이 지도하기 어려우나 자유여행인지라 정해진 일정에 쫓기지 않고 우리의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일찌감치 배가 고프다며 공용 공간으로 내려온 아이들부터 차례차례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간단한 조리를 하고, 식사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정리하는 것까지 모두 각자가 해야 하는 몫이었다.
다소 아쉬운 점은 조리법이 일어로 쓰여 있다 보니 방법을 파악하는 데에 더 많은 도움이 필요했고, 숙소의 전자레인지가 레버를 돌리는 옛날 방식이라 아이들이 조리시간을 설정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도 차려진 음식을 먹기만 하거나 여럿이 역할을 나누어하던 다른 때와 달리 각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몫을 책임진다는 점이 좋았다. 스스로 원하는 음식을 선택한 덕분인지 -아침식사로 부적절한 메뉴나 양을 골라 약간의 조정을 거친 학생들은 있으나- 모두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유니버셜 스튜디오 재팬으로 가는 길
둘째날의 일정은 아이들이 가장 기대하던 유니버셜 스튜디오 재팬(USJ)이었다. 이 숙소를 택한 이유 중 하나도 USJ에서 '캡틴라인'이라는 배로 10분 거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다만 운영시간이 날마다 유동적이었고, 늦게까지 운영을 하지는 않아 갈 때는 배를 타고 올 때는 지하철이나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사실 여행 전 가장 걱정했던 것 중 하나가 USJ 일정이었다. 유튜브나 블로그, 카페를 보면 각종 USJ 이용팁들이 나와 있는데 공통적인 조언이, 사람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놀이기구를 우선 탑승할 수 있는 익스프레스 티켓이나 닌텐도 월드의 입장을 보장해 주는 확약권을 구입하라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개장 전에 도착해서 오픈런을 하거나 더 빨리 입장할 수 있는 얼리파크인을 구매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입장권만 8만 원(시즌마다 다름) 가량인데 익스프레스나 닌텐도 확약권을 구입하면 약 두 배로 비용이 훌쩍 뛰었다. 다함께 오픈런을 하는 것도 무리였다. 19명의 아이들과 준비를 하다보면 아무리 서둘러도 한계가 있다.
고민 끝에 스릴 있는 놀이기구를 즐기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가는 날이 그나마 덜 붐비는 A시즌이라는 점에 희망을 걸고 그냥 입장권만 구입해 가기로 했다.
무얼 해줘도 우리가 준 것 이상으로 즐거워해주는 아이들이라는 점도 용감한 선택의 이유였다. 실제로 아이들은 여행을 준비하며 놀이공원 영상만 보고도 놀이기구를 탄 것마냥 신나 했었다. 놀이기구 몇 개쯤 덜 탄다고 쉬이 없어질 흥이 아니었다.
아이들과의 행사가 힘들고 손이 많이 감에도 매번 다양한 활동을 고민하고 추진하게 되는 데에는, 애쓴 것 이상으로 행복해하는 아이들이 있고 그 덕분에 나 역시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인터넷 정보들은 자유여행에 꼼꼼한 조력자가 되어주지만 때론 개인의 상황과 취향에 따라 남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도 괜찮다.
그래서 우리는 유유자적, 남들은 오픈런을 하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10:30 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캡틴라인 페리를 타는 '가이유칸 서쪽 부두'까지는 도보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구글지도를 손에 꼭 쥔 아이들이 날듯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길이었고, 도착한 승선장에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여기 맞아? 문을 닫았는데?"
10시가 넘었는데 문이 닫힌 매표소는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우리보다 먼저 와 앉아있는 외국인 두 명만이 한줄기 위안이었다.
"주변에 다른 매표소나 직원이 있나 찾아볼래?"
확인차 캡틴라인 홈페이지에 접속하며 아이들에게 미션을 주었다. 여행 이틀차, 티켓팅을 위해 앞장선 나의 곁에 있는 선두그룹 아이들은 든든한 조력자였다.
"여기, 안내문이 있어요! 첫 차 출발 15분 전에 연대요!"
매표소를 살피던 한 아이가 크게 외쳤다.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휴대폰에는 우리가 공부한 파파고 번역기가 켜져 있었다.
전날 편의점에서도 먹거리의 글자를 하나하나 번역해 가며 신중하게 살 것을 고르더니 금세 어플 활용에 익숙해진 아이였다. 배운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두 달여 간 여행을 준비한 시간을 보다 보람된 기억으로 남게 해주었다. 위대한 발견을 칭찬해 주자 몇몇 아이들이 따라서 안내문을 번역해 보고는 그 말이 맞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매표소는 안내대로 15분 전에 열렸고, 티켓은 1인 900엔의 적지 않은 금액에도 현금 결제만 가능했으며, 간이영수증을 받았다. 빠른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겐 다소 낯선 문화였으나 어쨌든 그렇게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가는 배에 올랐다. 승선 시간은 짧았지만 아이들은 배 또한 관광지인양 즐거워했고, 2층에 올라가 바람을 쐬고 사진을 찍자 금세 유니버셜 시티 포트에 도착했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유니버셜 스튜디오 재팬으로의 입성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brunch.co.kr/@h-teacher)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