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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만복대(萬福臺, 1433.4M)에서 곡성군의 섬진강과 기차마을 방향으로 뻗은 견두지맥 산줄기의 으뜸 봉우리인 호두산(虎頭山, 774M)이 남원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다. 이 호두산 기슭 홈실 마을의 몽심재 고택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만석꾼이었던 집주인의 사랑채가 높은 자연석 축대 위에 당당하다.
 
 몽심재 사랑채 전면
몽심재 사랑채 전면 ⓒ 이완우

이 몽심재의 사랑채는 길손에게 문이 활짝 열려있어 조선 시대에 한양으로 가는 길목의 명소였다. 몽심재는 나눔과 배려의 실천을 변함없이 펼쳤으므로 과객들이 편안히 머무르며 학문과 예술의 교류하는 열린 사랑방이었다.

사랑채는 정면 5간 측면 2간으로 면적은 80㎡의 크기이고 건물 가운데에 몽심재(夢心齋) 현판이 걸려있다. 사랑채 정면 기둥은 6개는 팔각으로 다듬어져 있어 눈길을 끈다. 양쪽 끝기둥인 우주(隅柱)의 팔각 기둥 상부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몽심재 편액
몽심재 편액 ⓒ 이완우

사랑채는 5행 2열로 10개의 방이 활용 가능한데 8개 방이 이곳 사랑방을 찾아 머무는 길손을 위한 공간이었다. 만석꾼 양반의 저택이지만 지붕 처마에 부연조차 절제한 이 고택의 건물들은 안으로는 근검 소박하고 밖으로는 나눔과 배려를 실천했던 몽심재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몽심재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 숨어 있는 가옥이다. 문간채는 하인을 배려한 정자를 갖췄고, 사랑채는 과객을 위한 넉넉한 사랑방이 열려있고, 안채에도 하녀들을 배려하는 여러 공간과 시설이 있었다. 사랑채 옆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는데 한복을 입은 여성들을 배려하여 계단이 낮고 넓다.
 
 몽심재 마루 팔각 기둥
몽심재 마루 팔각 기둥 ⓒ 이완우
 
이 저택 몽심재의 정신적 뿌리는 고려 말에 정몽주, 이색과 친교가 깊으며 뜻을 같이했던 고려의 충신 박문수(朴門壽)이다. 그의 아들 박포((朴苞, ?~1400)가 조선 초기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처형되었다. 이때 박포의 조카 박자량(朴子良)이 한성판윤이었는데 전라관찰사로 좌천되자 이 죽산(竹山) 박씨 가문은 남원 수지면에 은거하여 정착하였다.

박문수는 정몽주의 선죽교 참사 소식을 듣고 한시를 지었는데 전원으로 돌아갈 귀거래(歸去來)의 심경과 백이와 숙제의 마음을 다짐하는 충절의 내용이었다.

격동류면원량몽(隔洞柳眠元亮夢)
등산미토백이심(登山薇吐伯夷心)
마을에서 멀리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을 꿈꾸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와 숙제의 마음을 드러낸다.


박문수의 14세손인 박동식(朴東式 1753∼1830)은 이곳 홈실 마을에 만석꾼의 저택을 지으면서 이 시에서 몽(夢)과 심(心) 두 글자를 따와 사랑채를 몽심재라고 하였다. 600년 전 고려 말 박문수의 귀거래사와 충절의 정신은 250년 전 훈몽재에서 인간 존중의 나눔과 배려를 실천하는 정신으로 거듭났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몽심재 낮달맞이꽃
몽심재 낮달맞이꽃 ⓒ 이완우
 
하지 절기를 열흘 앞둔 초여름 신록이 몽심재 정원에도 가득하다. 사랑채 아래 뜰에는 낮달맞이꽃이 분홍색 꽃잎을 펼치고 있다. 밤에 피는 달맞이꽃과 꽃잎이 닮았지만, 한낮에 피는 낮달맞이꽃은 다년생 숙근초로 개화기간 긴 귀화식물로 꽃말은 무언의 사랑이다.

#남원 몽심재 사랑채#몽심재 팔각 기둥#몽심재 기둥 태극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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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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