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9일 금요일 오전 9시 반, 국립서울현충원 납골당인 제2충혼당에서는 아주 특별한 유해 봉안식이 있었다.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배경진 애국지사(1910~1948, 38살로 순국, 1990년 애국장 추서)와 그의 배우자인 이석금(1915~2012, 97살로 작고) 여사가 생이별을 한 지 80년 만에 국립서울현충원의 납골당(충혼당)에서 비로소 함께 영면에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살 무렵에 헤어진 아버지
이날 배경진·이석금 부부의 한 점 혈육인 딸 배국희(1943년생, 2살 때 아버지와 헤어짐)씨는 미국 LA의 공원묘원에 묻혀있던 어머니 이석금 여사의 유해를 직접 모시고 와서 기자와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으로 향했다. 배국희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자신과 함께 찍은 부모님의 흑백 사진 1장이 전부다. 아버지는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중국에서 순국하는 바람에 유해는 찾지 못한 채 위패만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가 이번에 어머니 유해와 함께 80년 만에 충혼당에 함께 모시게 된 것이다.
아버지 배경진 애국지사는 평안북도 신의주 위화면 하단동 출신으로 스물한 살 때인 1931년, '위화면 청년단'을 결성하고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조직은 남·북·만주에서 활약하는 독립군을 지원하던 단체로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 장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충돌 사건으로 일제는 한·중의 민족감정을 자극해 두 민족을 분열시키고 만주사변 촉발에 이용하려 했다)이 일어나자 일제의 획책을 감지한 배경진 애국지사는 자신이 속한 위화면 청년단 단원 수십 명을 이끌고 일본경찰 주재소를 여러 차례 습격, 방화하는 과정에서 붙잡혀 1932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 뒤, 배경진 애국지사는 1943년 3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광복군 제3지대 공작원에 입대했다. 여기서 국내의 거점확보와 정치·경제·사회를 교란하라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북경에서 동지 포섭과 한국인 학생들의 비밀 지하공작, 독립사상과 민족의식 고취 등 일제의 패망을 위한 공작을 활발히 펼쳤다. 이 무렵 따님인 배국희 지사는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 구경을 하기 전이다. 어머니의 출산 이후 두 살 무렵에 헤어진 아버지는 영영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상봉하지 못했다.
이제 겨우 돌 지난 딸아이를 안고 홀로된 어머니 이석금 여사의 삶은 더 말해 무엇하랴. 더구나 부모님 고향은 평안북도였기에 남한에는 일가친척 피붙이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혈혈단신 모녀는 서로를 의지하며 남한 땅에 발을 딛고 아버지 없는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외동딸을 이화여대에 입학시켰고, 졸업 후 딸은 더 넓은 세상에서 학업을 이어가고자 미국행을 택했다. 이후 고국에 홀로 남아있던 어머니가 미국으로 건너가 함께했다.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11년 전 97살로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그랜델 포레스트 로운(Glendale Forest Lawn)에서 쉬시다가 이제 드디어 사랑하는 어머니의 고국땅으로 돌아갑니다. 오매불망 그리시던 어머니의 고향, 평안북도가 아닐지라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남편의 위패와 함께 영면에 드실 어머니! 빼앗긴 나라 되찾겠다고 광복군 되어 떠난 남편 찾아 중국땅을 헤매시던 어머니! 사랑하는 남편을 조국에 바치고 오로지 이 못난 딸 하나를 바라고 자신의 평생을 희생하신 나의 훌륭하신 애국자 어머니! 이 나이 들도록 철없이 살아온 딸이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고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곧 보딩이 시작됩니다. 어머니! 제2의 고향 삼아 사시던 미국땅을 이제 떠나려니 눈물이 납니다. 어머니!"
이는 배경진·이석금 부부의 외동딸인 배국희씨가 LA공항을 떠나기 전 어머니 유해를 가슴에 품고 한 말이다.
"어머니는 1976년, 61살의 연세로 딸과 사위가 사는 휴스턴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36년을 미국 땅에서 사시다가 2012년 97살을 일기로 돌아가셨지요. 어머니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휴스턴보다는 지인이 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정착하시길 원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어머니는 재봉일을 손에서 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편히 모셔야 하는데도 유학생 부부의 가난한 생활을 염려하신 어머니는 당신이 손수 재봉일로 돈을 모아 저희에게 틈틈이 보태주실 만큼 생활력이 강하셨습니다. 어머니 덕에 저희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어머니가 삶을 마치실 때까지 함께 했습니다."
순국한 광복군의 아내는 두 살짜리 딸과 함께 모진 세월을 이겨내야 했다. 어머니의 강직한 성품을 닮은 배국희씨는 미국 LA에서 대한인국민회 이사장, 미주 광복회 지회장을 13년 동안 맡았으며, 광복회미서남부지회 창립 초대회장 4년을 역임하는 등 독립정신 선양을 위해 혼신을 다해왔다. 현재도 민주평통수석부회장을 맡아 활약하는 등 30여 년 동안 미주지역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0회 KBS 해외동포상(2019) 수상자로 뽑히기도 했다.
배국희씨는 수상 소감에서 "제20회 KBS 해외동포상 수상 소식을 듣고 7년 전 돌아가신 어머님이 떠올랐습니다. 두 살 때 독립운동 하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님 혼자 저를 키우시면서 '항상 올바른 길을 걸어라. 그리고 나라를 위해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그 일을 하라'고 하시면서 당신 스스로 모범을 보였던 어머님이 그 누구보다도 기뻐해 줄 실 것으로 믿습니다"라며 수상의 기쁨을 돌아가신 어머님께 돌렸다.
"오래된 숙제를 푼 듯 하여 기쁩니다"
배국희씨의 어머니 이석금 여사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제2충혼당(601294)에 봉안되었다. 봉안 예정 시간에 맞춰 9시 30분,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제례실로 들어가니,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조화로 장식한 제례단에 잠시 유해를 올려두었다가 바로 납골당으로 이동하는 절차로 진행되었다. 기자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80년 만에 해후한 광복군 아버지 위패와 어머니 유해와의 만남이 매우 쓸쓸했을 듯 싶어 안쓰러웠다.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이승에서 백년해로할 수 있는 부부연(夫婦緣)이 그만 신혼의 시간도 누리지 못하고 끊어졌으니, 이 무슨 하늘의 조화란 말인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위패와 한 줌의 재로 고국 땅을 찾은 어머니의 유해를 안고 납골당 캐비닛 앞에 서 있는 따님을 바라다보자니 기자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오늘은 위패로만 존재하는 아버지와 유해로 돌아온 어머니가 비로소 해후한 날입니다. 딸로서 오래된 숙제를 푼 듯하여 기쁩니다"라며 배국희씨는 슬픔을 삭히며 말했다. 봉안 절차는 20분도 되지 않은 채 끝이 났다. 우리는 유해를 봉안한 제2충혼당 봉안함에 묵념을 하고 빠져나와 주차장이 있는 제1충혼당 쪽으로 걸어나왔다.
머나먼 땅 중국에서 순국한 애국지사 배경진, 그의 사랑하는 아내 이석금 여사는 향불 하나 피워주지 않는 고국의 납골당에서 80년 만에 해후했다. 조금은 쓸쓸했지만, 미세먼지 하나 없는 충혼당의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그나마 우리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애국지사 부부께서 이승에서 다하지 못한 사랑을 저 하늘나라에서 꼭 이루시길 비는 마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을 뒤로했다.